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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331 컬쳐

사소하게 연연하는 - 소설로 폭로된 삶, 진실은 누구의 것인가? <디스클레이머>

2025.03.07

드라마 〈디스클레이머〉 스틸 © Apple TV+

많은 경우 진실은 현실이라는 말과 동의어처럼 쓰인다. 현실에서 일어난 그대로라면 그것이 진실로서 받아들여진다는 뜻이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여러 사람의 삶이 교차하고, 똑같은 사건도 사람에 따라 달리 인식된다. 각자에게는 자신만의 진실이 따로 존재할 수 있다. 그렇다면 내게는 내가 본 진실을 말할 권리가 있을까? 내가 써 내려간 진실이 타인의 진실과 상충한다면 말해서는 안 되는가? 혹은 누군가의 현실이 나의 현실을 침해했을 때 나는 일방적 피해자가 되는가? 이는 문학에서는 늘 첨예한 문제이다.

애플 TV의 〈디스클레이머〉(총 7부작)는 현실과 진실의 경계 사이를 아슬아슬하게 넘나드는 드라마이다. “디스클레이머(disclaimer)”라는 명사는 “책임을 부인하다”라는 동사 “disclaim”에서 유래했다. 디스클레이머는 보통은 픽션의 앞에 붙는 문구를 가리킨다. 영화나 드라마의 맨 앞 장면에서 흔히 보듯이 “이 작품은 실제의 사람, 기관, 사건과 관련이 없습니다.”라고 붙이는 말들이다. 즉, 작품이 일으킬 수 있는 법적 문제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한 장치이다. 책장이나 스크린에서 일어나는 서사가 설사 실존 인물이나 사건을 떠올리게 하더라도 그건 순전히 우연일 뿐이라고, 현실 연상의 가능성을 부인하기 위해서 미리 붙이는 말이 바로 디스클레이머이다.

드라마 〈디스클레이머〉 스틸 © Apple TV+

드라마가 시작되면 카메라의 조리개처럼 화면이 중심부의 작은 원에서부터 점점 퍼져간다. 마음의 준비도 되지 않았는데, 젊은 남녀가 유럽의 기차 안에서 발랄하게 정사를 벌인다. 약간의 소동이 있고 난 뒤, 다시 뒤엉킨 두 남녀를 비추는 화면이 다시 원형으로 좁아지면 어떤 목소리가 말한다. “내러티브와 형태에 주의하세요. 그 힘으로 진실에 다가갈 수도 있지만, 우리를 조종하는 무기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극 전반을 아우르는 중요한 메시지이지만 금방 잊히고 만다. 곧이어 주인공 캐서린 레이븐스크로프트(케이트 블란쳇)의 아름다운 얼굴이 화면을 가득 채우기 때문이다. 성공한 다큐멘터리 감독인 캐서린은 20년 동안 활동했던 공적을 인정받아 권위 있는 상을 수상하는 현장에 있다. 진실에 대한 메시지는 캐서린의 활약을 요약하는 시상 연설처럼 들리고 만다.

하지만 주의 깊은 시청자라면 이미 경계심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앞으로 펼쳐질 이야기는 결국 내러티브가 재구성하는 현실의 위험을 보여준다. 이 드라마는 크게는 세 가지 시점에서 진행된다. 하나는 맨 처음 등장했던 젊은 커플의 남자, 조나단(루이스 패트리지)과 관련된 과거에 이탈리아에 일어난 사건이다. 이탈리아의 환한 햇빛 속, 오래된 엽서 사진 같은 풍경 속에서 예상 못 한 격정이 일어난다. 드라마의 중심 시점은 이인칭 “당신”으로 지칭되는 서사로서, 행복의 절정에 서 있던 캐서린이 어느 날 우편으로 〈낯선 사람〉이라는 독립 출판 소설을 받는 사건으로 시작된다. 단출한 책 표지를 넘기면 “나의 아들, 조나단에게”라는 헌사와 “실존하거나 죽은 인물과 닮은 점이 있다면 우연이 아니다”라는 기묘한 디스클레이머가 나온다. 캐서린은 이 얇은 소설 속에 20년 전 이탈리아에서 만났던 남자와 관련된 자신의 비밀이 묘사된 것을 보고 구토할 정도로 소스라치게 놀란다. 세 번째 일인칭 내러티브의 주인공은 늙고 지친 영어 선생 스티븐 브릭스톡(케빈 클라인)이다. 그는 9년 전 아내가 죽은 이후 멈춰버린 초라한 시간 속에서 발버둥 치다 아들의 유품인 사진과 아내가 남긴 원고를 발견한다.

드라마 〈디스클레이머〉 스틸 © Apple TV+

쉽게 믿을 때, 진실이 된다

배신과 불륜, 선정적 섹스와 치명적 복수, 살인 음모, 삶을 뒤흔드는 충격적인 사건들이 알폰소 쿠아론 감독 특유의 아름다운 화면과 대조되어 보는 이의 마음을 날카롭게 파고든다. 혼란스러웠던 타임라인이 한데로 모이면 이 드라마는 스티븐이 〈낯선 사람〉이라는 소설로 캐서린의 진실을 폭로하여 아들과 아내의 복수를 하려는 이야기임이 드러난다. 〈낯선 사람〉 속에서 재구성된 캐서린과 조나단의 과거는 너무도 생생하다. 화면 속에서 등장하는 이탈리아 해변의 이야기는 스티븐의 아내인 낸시(레슬리 맨빌)가 쓴 소설임을 잊을 정도이다. 캐서린은 헌신적인 남편 로버트(사샤 바론 코헨)와 아들인 닉(코디 스밋 맥피)을 배신하고 조나단과 쾌락의 밤을 보냈을까? 기실, 주어진 서사를 그대로 믿는 것은 독자와 시청자의 권리이자 의무이다. 의심을 중지해야만 이야기에 몰입할 수 있기 때문이다. 소설을 원작으로 하는 〈디스클레이머〉는 이런 독자의 본성을 교묘하게 이용해서 여러 겹의 의미를 만들어낸다.

먼저, 캐서린과 조나단 사이에 있었던 일처럼 내밀한 사건은 당사자인 두 사람 말고는 아무도 진실을 모른다. 하지만 몇 가지 상황을 짜맞추어 만들어낸 서사래도 흥미만 있다면 사람들은 그대로 받아들인다. 일단 그렇게 이야기가 퍼지면, 그와 어긋나는 증거가 발견되어도 다른 반박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완벽하게 신뢰할 수 있는 서술자란 없지만 우리는 이야기를 들으면 그 사람이 원칙적으로는 진실을 말한다는 전제하에 쉽게 믿어준다. 이렇게 선택적으로 조합된 이야기가 진실로 유통된다.

드라마 〈디스클레이머〉 스틸 © Apple TV+

〈디스클레이머〉는 에피소드가 시작할 때마다 자신만의 경고문을 담고 있다. “이 시리즈는 수위 높은 성적 장면과 성적, 육체적, 정서적 폭력을 담고 있어 시청자의 주의를 요합니다.” 성적 장면은 초반부터 등장하지만, 여기서 말하는 폭력 장면은 무엇을 가리키는지 금방 잡히지 않는다. 드라마를 다 보고 나면 아이러니하게도 이 경고문에 사건의 진실이 숨겨져 있음을 깨닫게 되지만, 그때까지는 이를 눈여겨본 사람은 많지 않았을 것이다. 마지막 에피소드에 이르러, 캐서린이 진실을 말하기 전까지는 〈낯선 사람〉 소설과 다른 이야기가 있으리라고 짐작하는 사람조차 없다. 마지막까지 다 본 후에 처음으로 가서 드라마를 돌아본다면, 모든 장면의 감정은 새롭게 재해석된다. 쾌감은 고통이 되고, 걱정은 혐오가 되며, 애도는 안도가 된다.

한번 스며든 의심은 이야기가 끝난 후에도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다. 그러면 마지막에 캐서린의 입을 통해 알려진 진실은 진짜인가? 혹은 그저 이 설명을 받아들이는 편이 편하기 때문에 진실로서 남겨진 것인가? 이 의심은 양면적이다. 일방적인 관점에서 기술된 진실은 반드시 의심해야 한다. 하지만 한번 의심이 일어나면 후에 누군가가 정말 진실을 설명할 때도 쉽게 믿을 수 없게 된다. 많은 여성이 현실의 피해를 발화하지 못하는 이유이다. 〈디스클레이머〉는 제목 그대로 실제 사람과 기관을 다룬 이야기는 아니겠지만, 현실에서 분명히 존재하는 사건과 연결되어 있다. 사람들이 자신의 진실을 알린다는 이유로 타인의 진실을 왜곡하고 모른 척하는 일은 우리 현실에서도 매일 일어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디스클레이머〉는 진실은 상대적이며 영원히 알 수 없다고 회의적으로 마무리되는 이야기는 아니다. 비밀을 선뜻 말하지 못하는 사람이라고 해서 반드시 거짓말을 한다는 뜻은 아니다. 거짓말을 할 이유가 있는 사람은 본인의 망상에 가까운 바람을 담은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분명히 더 사실에 가까운 이야기는 있다. 일부러 무시했던 증거에 귀를 기울여라. 그러면 마음이 진실을 알려줄 것이다. 평소에 오래 관찰했던 본성, 몸에 남은 흔적, 언뜻 드러나는 목소리와 표정, 거기에 진실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마지막에 스티븐이 타오르는 불꽃 속에서 발견한 것처럼 진실의 조각들이 우리 주변엔 흩어져 있다.


글. 박현주

작가, 드라마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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