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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334(커버 B) 컬쳐

사소하게 연연하는 - 무엇인지 알 수 없지만 무엇이든 될 수 있는 소녀들

2025.05.16

〈선의의 경쟁〉

여학교 내의 서열과 경쟁, 애증 관계를 그리는 작품은 학원물 서사 전통의 한 갈래를 구성하는 확고한 장르이다. 고전 중의 고전, 에니드 블라이튼의 〈세인트 클레어 학교의 쌍둥이〉 시리즈를 기억하는 이도 있을 것이다. 일본 순정 만화의 대모 이케다 리요코의 〈디어 브라더〉는 교내 서열이라는 개념과 여학생들끼리의 묘한 성적 긴장감을 다루며 70년대 소녀들의 뇌리에 깊이 각인되었다. 1990년대 말 백합이라는 장르가 부활하고 널리 알려지는 데 기여한 작품으로는 단연 〈마리아 님이 보고 계셔〉가 꼽힌다. 한국에서 웹툰이라는 장르가 발달하기 시작하면서, 이 장르를 한국화한 작품들이 등장하기 시작하고 드라마로 만들어지기도 했다. 최근에 눈에 띄는 드라마로는 2024년 티빙에서 방영한 〈피라미드 게임〉이 있었는데, 부모의 부에 따른 학교 내 계급 형성을 투표 게임이라는 형태로 구현한 작품이다.

최근 이런 여학교 학원물의 계보를 이으면서 국제적 팬덤을 형성하는 드라마가 있다. 바로 U+tv와 U+모바일TV에서 공개한 미드폼 드라마 〈선의의 경쟁〉이다. 네이버 웹툰을 원작으로 했지만, 드라마는 많은 부분 각색을 거쳤다. 1회 오프닝, 우슬기(정수빈)는 어려서부터 존재감이 없었던 자기의 일생을 돌아본다. 공주 옷을 입고 유치원 소풍에 갔지만 사람들이 잊어버리고 가서 버려진 아이. 보육원에서도, 학교에서도 존재감이 제로인 것을 넘어서 마이너스가 될 만큼 괴롭힘을 당한 슬기는 공부만이 자신의 존재 의의를 채워준다는 것을 깨닫는다. 약물의 힘을 빌려서까지 공부에 매진한 슬기는 드디어 1등을 차지하고, 어른들의 인정을 받는다. 예기치 않은 기회로 슬기는 고3임에도 서울의 명문 학교인 채화여고로 전학하고, 거기서 전 학생회장인 유제이(이혜리)를 만난다. 메디컬 센터 원장의 딸로 부유하고 예쁘며 학교의 모든 권력을 독차지하는 제이는 슬기에게 이유를 알 수 없는 호의를 보이고, 슬기는 이런 제이에게 호기심과 의심, 그리고 매혹을 동시에 느낀다.

아직까지 가입자 수가 그렇게 많지 않은 플랫폼에서 공개되었지만, 〈선의의 경쟁〉이 화제성 순위 상위권을 차지하며 관심을 끈 이유는 무엇일까? 물론 초반에 슬기와 제이의 과감한 키스 신으로 화제를 불러 모았다는 건 부인할 수 없다. 〈선의의 경쟁〉의 인기 요인은 현재의 학원물이 지향하는 모든 요소와 동일하다. 계급 간 서열이 분명하고, 부모의 지위가 그대로 학생들에게까지 이어지는 학교 안 세계를 그린 드라마들은 동 세대 시청자의 몰입을 얻기가 쉽다. 기실, 한국 사회의 축소판인 학원물은 대학 입시를 향한 극심한 경쟁으로 상징되는 계급 투쟁을 그리는 데 익숙하고, 〈선의의 경쟁〉 또한 예외는 아니다. 최근 들어 한국의 학원물 드라마에서는 눈에는 눈과 같은 복수 원칙, 살인과 약물 같은 범죄 스릴러 요소가 부각되는 점이 눈에 띄는데, 〈선의의 경쟁〉도 이와 마찬가지로 플롯에서 추리 요소를 한층 더 강화했다. 수능 출제 교사인 슬기 아버지의 죽음이라는 커다란 미스터리 속에서 캐릭터들이 확고하게 구축되며 사건에 대한 흥미를 끌어나간다.

그렇다고 이런 자극성이 전부는 아니다. 최근의 학원물 인기 전략이 역설적으로 청소년 관람 불가 등급을 달고 폭력과 약물, 선정성의 묘사 수위를 높이는 것이라고 해도, 그 모든 작품이 〈선의의 경쟁〉만큼 긍정적 반응을 얻지는 못했다. 이 작품에는 다른 드라마에서 두드러지지 않는 요소들도 작동한다. 바로 치열한 경쟁이 가져온 범죄의 한가운데에서 피어나는 소녀들의 규정할 수 없는 감정들을 감각적으로 포착한 것이다. 학원물 모두가 성장이라는 모티브를 갖고 있으므로 아직 확정적으로 자리 잡지 않은 미정형의 무언가를 그려내고 있지만, 이성애에 크게 관심을 두지 않는 여학교 학원물은 자신도 파악하기 어려운 마음속에서 자라나는 설렘과 불안, 욕망과 쾌락을 있는 그대로 긍정한다.

소녀들의 죄책감 없는 삶이 자라나길

〈선의의 경쟁〉은 협의에서는 GL이라는 장르로 못 박을 수는 없겠지만, 광의의 의미에서는 백합물의 특성이 있다. 슬기와 제이가 서로에게 느끼는 끌림은 분명하지만 이 성격에 대해서는 모호한데, 둘의 관계가 다면적이기 때문이다. 피해자의 가족과 가해자의 가족이라는 스릴러적 관계, 명문 학교에서 모두가 추앙하는 여왕님과 그의 도움을 받는 전학생이라는 시혜적 관계, 1등을 두고 다투는 라이벌로서의 관계, 같은 사건을 추적하는 탐정 동료로서의 관계, 그리고 서로 적대할 수밖에 없으면서도 서로를 지켜주는 상호 구원적 관계를 두 사람은 보여준다.

어떤 이들은 두 사람이 서로에게 가진 감정이 우정인지 그 이상인지를 궁금해하겠지만, 〈선의의 경쟁〉은 그 대답을 주지 않는다. 이처럼 알 수 없고, 무엇이든 될 수 있는 감정 자체가 여학교 학원물이라는 장르에서 두드러지는 정서이다. 소녀들을 주인공으로 하는 작품에서 수수께끼 같은 신비함을 강조하는 방식은 양가적으로 평가할 수 있다. ‘이해하지 못한다’는 건 주체가 아닌 대상에 대해 갖는 감정이므로, 이런 비밀스러운 속성을 지나치게 낭만화하면 자칫 여성 청소년을 대상화하는 위험에 빠진다. 이 드라마에서 슬기와 제이는 물론, 경과 예리 같은 다른 인물들의 일탈을 그리는 방식에도 이런 대상화적 낭만이 끼어든다. 모범생처럼 보이는 경은 성적 호기심이 강하고, 미모로 유명한 예리는 유복한 척했지만 실제로는 어려운 경제 사정을 숨기느라 유흥업소에 나간다. 이런 캐릭터 설정은 클리셰적이고 어른, 남성 등 외부적 시선으로 소녀들을 바라본다는 위험이 있다.

하지만 〈선의의 경쟁〉에는 제목처럼 인물들을 “선의”로 바라보는 태도도 있다. 모두에게는 남에게 말하지 못할 비밀이 있고, 거기에서 오는 수치심과 죄책감이 있다. 특히 소녀의 심리를 그린 작품에서는 이런 죄책감이 더욱 강조된다. 사회적 금기는 여성들에게 훨씬 더 엄격하게 작동되고, 가정이든 학교든 위협은 외부에서 오지만 위험에 처한 여자아이들은 왜인지 모르게 자기를 탓하게 되는 경향이 있다. 슬기는 자기를 잃어버린 어른들의 잘못보다 존재감 없는 자기를 먼저 탓하고, 제이는 학대의 주체인 부모보다도 더 큰 죄의식을 갖는다. 경은 자신의 성적 욕망에, 예리는 자신의 가난에 수치심을 느낀다. 이 드라마는 이런 두려움까지도 모두 끌어안으며 캐릭터들에게 설득력을 부여한다. 죄책감을 벗고 싸워나가는 소녀들의 모습에서 동 세대의 여성들이 임파워링되는 감정적 효과가 일어난다.

배우들의 연기도 한층 성숙해졌다. 슬기 역의 정수빈은 〈트롤리〉와 〈아일랜드〉에서 했던 비밀스럽고 죄책감 깊은 역할을 반복하는 듯해도 명문고에 뛰어든 보육원 출신 전학생에 어울리는 강단을 보여주었다. 그간 톡톡 튀는 연기로 엇갈리는 평을 받았던 이혜리는 자기에게 잘 어울리는 옷인 유제이를 입고 다양한 겹의 내면을 지닌 소녀를 훌륭하게 형상화했다. 경을 연기한 오우리와 예리를 연기한 강혜원도 캐릭터의 개성을 잘 살려냈다. 물론 짧은 드라마인 〈선의의 경쟁〉은 만듦새 면에서 미숙한 점도 보인다. 후반부의 전개가 좀 늘어지고, 원작에서부터 지적되었던 인물들의 범죄 사실을 합리화하는 태도는 쉽게 받아들이기 어렵다. 하지만 미숙함은 10대의 특징이자 특권이 아닐까? 미숙함이라는 특질은 어떨 때는 결점이 아니라 매혹이 된다. 앞으로 무엇이든 될 수 있으니까, 더 채울 게 있으니까. 적어도 〈선의의 경쟁〉을 보면 소녀들의 죄책감 없는 삶이 자라나길 바라는 마음이 든다.

박현주

작가, 드라마 칼럼니스트.

글. 박현주 | 사진. 〈선의의 경쟁〉 스틸 ©STUDIO X+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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