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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오래전 내 연인이 되었던 그녀는,
나의 아내가 되었고, 두 아이의 엄마가 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신인이 되었다.
아직 얼마만큼 부풀어 오를지, 어떤 바람에 실려갈지 종잡을 수 없는,
그렇지만 어디로든 날아갈 수 있는 모든 가능성으로 부풀어 있는 비눗방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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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인의 감각을 유지하고 싶었다. 내가 점점 대단한 성우가 되어가는 것만 같아서 초심을 잊지 않겠다는 그런 기특한 다짐은 아니었다. 대본을 분석하고 마이크 앞에 서서 목소리 연기를 하는 일은 점차 일상이 되어갔다. 그러는 동안 그러한 일상으로 들어오고자 계속 문을 두드리는 사람이 아주 가까이, 내 곁에, 함께 살고 있었다. 나의 아내는 아주 오랫동안 성우 공채시험에 도전 중이었다.
우리는 성우 학원에서 만났다. 교제를 시작하고 두 달쯤 지났을 때 내가 공채시험에 합격해 먼저 학원을 떠나버렸다. 그 후 내가 성우로 경력을 쌓아가는 동안 아내는 아르바이트를 하기도 하고 회사에 취직을 하기도 했다. 그렇게 돈을 벌어 생계를 꾸리고 학원에 다녔다. 그러면서 계속 도전을 이어갔다.
나는 프리랜서가 되던 2013년에 두 번이나 연달아 큰 작품의 오디션에 합격했다. 드림웍스 애니메이션 <터보>와 신카이 마코토 감독의 <언어의 정원>에서 주인공 목소리를 맡아 연기했다. 그해에 아내는 EBS 최종 시험에 올랐다. 최종 시험을 보고 나온 아내는 어느 때보다 느낌이 좋다고 했다. 그런데 한 가지 조금 찝찝한 부분이 있다고 했는데, 필요 서류 하나를 깜빡하고 못 챙겨 갔다는 것이었다. 그 말에 시험 안내문을 다시 펼쳐 살펴보던 나는 한쪽 귀퉁이에 써 있는 문구 하나를 발견했다. ‘서류 미제출 시 불합격 처리함.’
결국 불합격 통보를 받고 자기 머리를 제 손으로 때리며 울던 아내의 모습이, <터보>의 바큇자국보다도, <언어의 정원> 속 타카오의 절규보다도 깊이 남아 있다. 그때 나는 신인이었고 아내는 신인이 되기 위해 애쓰는 지망생이었다. 그렇게 우리는 멀찍이 떨어져 함께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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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두께
우리는 7년간 연애를 하고 결혼했다. 결혼 3년 차에는 첫아기가 태어났다. 그러는 사이 나는 ‘스파이더맨’이나 ‘알라딘’처럼 이름만 들어도 알 만한 캐릭터의 목소리를 맡은 성우가 되었다. 아내는 꾸준히 성우 시험에 도전했지만, 번번이 불합격 통보를 받았다. 첫아기가 태어나던 해에도 KBS 성우 시험 최종 관문에서 고배를 마셨다.
신인의 감각을 유지해야 했다. 내 직업적 성취를 위해서가 아니라 아내와 멀어지지 않기 위해 그래야만 했다. 그 감각을 유지하기 위한 가장 간단한 방법은 지망생을 가르치는 것이었지만 나는 그 길을 택할 수 없었다. 매일 만나다가 함께 살게 된 사람도 합격을 못 시키는데 누굴 합격시킨다고 수업을 한단 말인가. 그러다 혹시 아내는 놔두고 남을 합격시키는 일이 벌어진다면 그건 그것대로 끔찍한 일이었다. 다른 방법을 찾아야 했다.
녹음 경험이 쌓일수록 긴장감은 반비례하여 사라져갔다. 숙련이 되어도 긴장을 유지하는 방법은 연습의 난이도를 높이는 것이었다. 나는 끊임없이 더 어려운 글과 대본을 찾아다녔다. 신인의 감각을 유지하는 또 다른 방법은 계속 새로운 일을 경험하고 배우는 것이었다. 사회를 보러 다니고, 독학으로 사진을 배우고 노래를 공부했다. 10년 차를 앞두고는 미뤄두었던 글쓰기 수업을 들었고, 기회를 만나 에세이 연재를 시작했다.
연차는 시간이 지나면 알아서 쌓인다. 그 시간의 두께는 그 사람을 점차 신인의 때로부터 멀리 떼어놓는다. 신인의 감각은 자연스레 잊혀간다. 그것은 중력처럼 당연한 현상이다. 온 힘을 다해 저항하지 않는 한 그렇다. 나는 몸부림칠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나에게 하나의 캠페인과 같은 일이어서 육아마저도 그 수단이 되었다. 첫째 아기 출산을 경험하는 동안에는 아예 인생을 통째로 복습하고자, 어릴 때 읽었던 책과 영화들을 다시 보았다. 나는 아내의 말에 귀 기울일 수 있어야 했고, 완벽하진 못해도 최대한 그 입장에 가까이 다가가 아픔을 경험할 수 있어야 했다. 그래야만 아내가 꿈을 잃는 순간이 오더라도, 나는 그녀를 잃지 않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러려면 나는 신인과 같아야 했다.
이 글은 '신인 (2)'로 이어집니다.
글. 심규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