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이지상단으로이동
신간 · 과월호 홈 / 매거진 / 신간 · 과월호
링크복사
링크가 복사되었습니다.
글자확대
글자축소

No.278 에세이

신인 (2)

2022.07.15

ⓒ unsplash

이 글은 '신인 (1)'에서 이어집니다.

신인으로 북적이는 집 안
그렇게 12년이 흘렀다. 2022년 KBS 47기 성우 공채시험 공고가 뜬 것은 4월 중순이었다. 불합격 통보를 듣기도 전에 공고를 보고 낙담이 되기는 처음이었다. 둘째 출산 일정과 시험 일정이 완전히 겹쳐 있었다. ‘혹시 모르니까’라며 만삭의 아내는 마치 습관처럼 1차 시험 파일을 녹음하고 접수를 마쳤다. 그리고 1차 시험 결과가 나오기도 전에 둘째 아기가 세상에 나왔다. 4월 30일생 갓난아기를 끌어안고 아내는 조리원에 들어갔다. 거기서 1차 합격 소식을 듣고 외출 허가를 받아 방송국에 택시를 타고 가서 2차 시험을 치렀다. 다시 합격. 마지막 3차 시험일은 조리원에서 퇴소한 지 나흘째 되는 날이었다.

그날은 재이(첫째 딸)의 두 번째 생일이기도 했다. 뒷좌석에 재이와 아내를 나란히 태우고 여의도로 출발했다. 도로에 차가 많아 하마터면 제시간에 도착하지 못할 뻔했다. 가까스로 도착한 여의도 KBS 본관 앞은 내가 서울에 막 올라와 처음 아르바이트를 했던 그 풍경을 여전히 품고 있었다. 아내가 시험을 보는 동안, 나는 재이랑 방송국 한 귀퉁이에서 비눗방울을 쏘며 뛰어다녔다. 가끔 바람이 불면 비눗방울은 정말 높이까지 떠올랐다. 그렇게 높이 떠오르는 방울을 볼 때마다 재이는 높이 손을 뻗으며 해맑게 웃었다.

ⓒ unsplash

느닷없이 등 뒤에 있던 둑이 터진 듯 떠밀려 출산과 시험을 동시에 친 것 같았다. 최종 실기 시험으로부터 나흘 뒤 합격자 발표가 났다. 그날 오후 3시에 홈페이지를 통해 발표가 나기로 되어 있었다. 나는 그날 오후 2시 40분부터 금천구 가산동에서 <유미의 세포들> 녹음 일정이 있었다. 최종 관문에서 떨어졌던 수많은 경험들을 바탕으로 나의 이성세포는 내게 기대를 내려놓으라고 아우성쳤다. 하지만 12년 전 내가 합격 발표를 들었던 장소도 바로 가산동이었다는 이유를 들며 나의 감성세포는 설레발을 쳐댔다. 몸 안의 모든 세포들이 그 설레발에 들떠서 너도나도 비눗방울을 불어대는 것 같았다. 나는 도무지 녹음에 집중할 수 없을 것 같아, 아예 건물 1층에 짐과 함께 휴대폰을 놓아두고 녹음실에 올라가야 했다.

녹음이 진행되는 동안, 3시가 지났다. 녹음이 거의 끝날 무렵 대사가 딱 한 마디 남았는데 무슨 일인지 별안간 기계가 먹통이 되었다. 녹음실장이 기계를 껐다 켜는 동안 잠시 기다려 달라고 했다. 결과가 궁금해 도저히 견딜 수 없었던 나는, 결국 대본을 보던 아이패드로 카카오톡을 열어보았다. 아내의 톡에 빨간 표시가 떠 있었다. 그 톡을 열어본 순간 기계가 다시 켜졌다. 남아 있는 대사는 정말 평범한 대사였는데, 도무지 담담하게 대사를 할 수가 없어서 한참 숨을 골라야 했다.

ⓒ unsplash

아주 오래전 내 연인이 되었던 그녀는, 나의 아내가 되었고, 두 아이의 엄마가 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신인이 되었다. 아직 얼마만큼 부풀어 오를지, 어떤 바람에 실려갈지 종잡을 수 없는, 그렇지만 어디로든 날아갈 수 있는 모든 가능성으로 부풀어 있는 비눗방울.

갑자기 집 안에 신인들이 북적인다. 나는 이제 그 감각을 영원히 잊지 못할 것 같은 기분이다.


글. 심규혁


1 2 3 4 5 6 7 

다른 매거진

No.330

2024.12.02 발매


올해의 나만의 000

No.330

2030.03.02 발매


올해의 나만의 000

No.329

2024.11.04 발매


요리라는 영역, 맛이라는 전개

《빅이슈》 329호 요리라는 영역, 맛이라는 전게

No.328B

2027.05.02 발매


사주 보는 사람들, 셀프 캐릭터 해석의 시대

《빅이슈》 328호 사주 보는 사람들, 셀프 캐릭터 해석의 시대

< 이전 다음 >
빅이슈의 뉴스레터를 구독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