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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279 에세이

당신의 이야기를 기다립니다 ― 연희동 포셋

2022.07.23

ⓒ 《빅이슈》 279호_70P

손글씨로 쓰인 것을 잘 버리지 못한다. 초등학교 때 미국으로 이민 간 친구와 10년 넘게 주고받았던 국제 편지, 사소하기 그지없는 일상 속 포스트잇 쪽지들, 엠티 때 받은 롤링페이퍼, 생일 축하 카드, 여행의 단상을 기록한 엽서들까지. 이야기를 기다리는 3,200여 장의 엽서들 사이를 오가며 손으로 직접 쓴 글의 생존력에 관해 생각한다.


저기 한 여자가 창가의 햇살을 몸에 절반쯤 걸치고는 1인용 책상에 앉아 무언가를 꾹꾹 눌러쓰고 있다. 엷게 스민 미소를 보니 누군가에게 고백이라도 하려는 걸까. 여백이 빼곡한 글로 채워지고, 정자세로 시작했던 고개의 위치가 어느새 책상에 닿을 만큼 내려와 있다. 서울 연희동 포셋(poset)을 처음 갔을 때 목격한 이 장면은 기억 어딘가에 저장되어 있던 먼지 쌓인 정서를 단번에 불러왔다. 마음에 드는 편지지를 펼치곤 단어를 고르고, 문장을 다듬어가며 하고픈 말을 직조했던 순간. 휴대폰 문자나 SNS 메시지로는 재현되지 않는 글들. 전자 메일이나 휴대폰 메시지를 보낼 때와는 다른 마음의 무게.

두 번째 포셋을 찾았을 때는 나도 마음에 드는 엽서 한 장을 골라 들고는 1인용 책상에 자리를 잡았다. 150×100mm의 하얀 여백에 잔상이 계속 남았던 고마움을 꾹꾹 눌러 담을 참이었다. 오랜만에 펜을 잡아서인가, 엄지와 검지에 자꾸만 힘이 들어갔다. 손글씨에는 적지 않은 물리적 노동력이 든다. 마음을 생각으로 만들고, 생각을 다시 활자로 변환해 손끝으로 밀어내는 노동력. 고쳐쓰기 쉽지 않아서인지 단어와 단어 사이에도 생각이 한참은 더 머문다. 확실히 타다닥 키보드로 친 문장보다 쓱싹쓱싹 펜으로 밀고 나간 글이 더 내 마음과 더 닮았다.

도서관에 가득한 책들이 엽서로 바뀌면 어떨까 하는 상상에서 출발한 공간, 포셋. 6월 초에 문을 열었으니 아직 한 달도 되지 않았지만 내가 갈 때마다 사람들이 엽서만큼 빼곡했다. 게다가 다섯 개 정도 되는 1인용 책상은 대부분 만석. 사람들은 하나같이 저마다의 각도로 몸을 틀고는 열심히 무언가를 쓰고 있었다. 글을 쓰고 싶은 태도와 마음을 만들어주는 공간. 도서관 책장 같은 진열대 사이로 3,200여 장이 넘는 엽서와 100여 종의 편지지가 아직 활자화되지 않은 이야기를 기다린다. 소중한 이에게 전하는 사랑의 메시지, 축하와 감사의 언어들, 그저 그런 하루를 특별하게 만들어주는 환대의 문장들이 꾹꾹 눌러쓴 손글씨로 엽서에 새겨지겠지. 엽서를 고르는 사람들 표정 너머의 알록달록한 설렘에 나까지 기분이 좋아졌다.

진열대에 놓인 엽서들을 하나하나 보고 있자니 작은 갤러리에 온 것 같은 느낌도 들었다. 엽서 앞면에 담긴 근사한 일러스트나 사진은 그 안에 담길 이야기를 더욱 입체적으로 만들어주는 도판 역할을 한다. 평소 좋아했던 일러스트레이터의 엽서집, 독특한 레터링이 담긴 엽서, 흥미로운 인쇄 방식과 색다른 종이 텍스처를 경험할 수 있는 엽서들을 집어 들었다. 어릴 적 아빠가 외국 출장길에 사다 준 루브르 박물관 엽서집이 생각났다. 그때는 어려서 루브르 박물관이 뭔지 몰랐지만 종합과자선물세트를 받은 것만큼이나 들떴던 기억이 난다. 얼마나 들여다보고 또 매만졌는지 나중에는 양 모서리들이 나달나달해져서 결국 버렸더랬지. 사연을 전하는 매개와 수집의 대상, 그 사이 어디쯤 오늘 산 엽서들이 놓일 것이다.

엽서 진열대 끝, 공간 한 켠에는 작은 전시 공간이 있다. 현재 예진문의 <당신에게 건네는 39가지 여정> 전시가 진행 중이며 7월 31일까지 관람이 가능하다. 일상 속 가볍지만 오랫동안 생각이 머무는 39가지 질문들이 던져지고 그에 관한 문장들을 나누는 방식이다. 어느 집에서 머물고 싶나요?, 우리의 진짜 인생은 몇 살 때부터 시작이 될까요? 같은 화두에 각자의 답을 만들고 기록하며 전시가 완성된다. 좋아하는 것들을 글로 남기고 시각화하는 예진문. 그녀의 문장들과 함께 반짝이는 사진엽서도 만날 수 있다. 포셋과 예진문의 교집합은 ‘기록을 대하는 태도’겠다.

포셋은 기록을 아카이빙하는 방식도 제안한다. ‘보관함’ 서비스는 편지, 일기장, 사진, 소지품, 소중한 기록과 추억을 담은 것들을 물리적으로 보관해주는 포셋의 고유한 정체성이다. 기간에 맞는 비용을 지불하면 나만의 보관함과 그 열쇠를 받게 된다. 보관함 안에 넣어둔 기록을 꺼내고, 쓰고, 남기며 나만의 이야기들을 차곡차곡 쌓아나가는 것. 100일 동안 매일 쓴 편지를 보관함에 넣어두고 그 열쇠를 사랑하는 이에게 건네는 것도, 아무에게도 드러내고 싶지 않은 나만의 일기장을 온전하게 보관하는 것도 이곳에서는 가능하다. 이렇게 별도로 보관하고 싶은 글들이 있나 떠올려봤지만 막상 나에게는 없었다. 항상 누군가에게 보이는 것을 전제로 기록해서인가.

엽서를 매개로 글 쓰고 대하는 태도를 만들어주는 곳. 이 공간이 어떻게 자생하며 그 마음을 이어 나갈지 궁금하다. 3,200여 개의 엽서가 하나둘 각기 다른 사연을 담고 곳곳에 퍼져나가는 순간, 포셋의 실험은 저 스스로 확장할 것이다. 연희동 오래된 건물 3층. 150×100mm의 하얀 여백들이 옹기종기 모여 당신의 이야기를 기다리고 있다.


글. 김선미
사진. 포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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