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만 스크린 위로 빼곡히 흘러가는 이름들. 영화가 끝난 뒤에도 머릿속에 남는 잔상, 그리고 화두들을 어둠 속에서 찬찬히 복기한다. 영화가 진득하게 내 안에 가라앉는 순간. 엔딩 크레디트가 올라감과 동시에 조명이 환히 켜지는 다른 상영관과는 달리 이곳은 영화를 찍은 사람들, 영화를 보러 온 사람들에 관한 예의를 이렇게 갖춘다. 영화제에서나 볼 법한 풍경이 경기도 파주 한 켠에서 조용히 펼쳐지고 있다. 주말마다 요란스럽지 않게, 정중하고 꾸준하게.

나에게도 그런 공간이 있다. 경기도 파주시 회동길에 자리 잡은 명필름아트센터가 바로 그 아지트다. 누군가는 책과 관련된 회사들이 모여 있는 파주출판도시로, 누군가는 북한 개성과 맞닿은 우리나라 최북단의 도시로 기억할 파주. 선약이 없는 주말이면 나는 예외 없이 30km 남짓한 거리를 뚫고 경기도 파주로 향한다.
즐거운 주말 루틴, 명필름아트센터 영화관
명필름아트센터는 영화제작사 명필름에서 운영하는 복합문화 공간이다. 믿고 보는 출판사, 믿고 듣는 레이블이 있다면 나에겐 믿고 선택하는 영화제작사가 있는데 그게 바로 명필름이다. 1995년, 첫 영화 <코르셋>을 만든 이래 항상 현실에 맞닿은 문제의식을 스크린에 투사해온 제작사다. 그들이 세상 밖으로 내놓은 영화들은 하나같이 동시대적이면서도, 때때로 문제적이었다. 남북 관계가 첨예한 긴장 관계에 있을 때 휴전선에서 우정을 쌓는 남북한 병사에 관한 이야기를 다루는가 하면,(<공동경비구역 JSA>) 비인기 종목인 핸드볼, 그것도 여성 주인공에, 패배한 실화를 기세 좋게 드라마로 확장하기도 했다.(<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 마트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투쟁과 연대를 그린 <카트>, 일본군 성노예 피해자의 이야기를 다룬 <아이 캔 스피크>에도 공통으로 흐르는 명필름의 ‘시선’이 있다. 주변부에 관한 끊임없는 관심, 사회가 저 멀리 밀쳐놓은 어느 지점에 관한 섬세하고 끈질긴 접근이 바로 그것이다. 상상력을 극대화한 작품보다는 발 디디고 있는 현실에서 동시대의 문제를 정면으로 바라보며 이야기를 시작하는 그들의 태도가 나는 늘 멋져 보였다.

관객으로서 응원하는 범주를 넘어 명필름을 내 생활 반경 안으로 깊숙이 들인 건 지금으로부터 약 7년 전인 2016년 무렵이다. 명필름은 서울 명륜동, 서촌 시절을 거쳐 2015년 파주출판도시 2단지로 사옥을 이전했다. 두 동의 건물 중 하나는 명필름 사무실과 명필름랩이라는 영화학교로, 그리고 나머지 한 동은 명필름아트센터로 운영하며 새로운 확장을 모색한 것. 건축가 승효상의 설계로 지어진 이 공간에는 영화를 사랑하는 지역사회 구성원부터 감독, 작가 등을 꿈꾸는 예비 영화인, 그리고 현직 영화인들이 모여들었다. 특히 명필름아트센터는 영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이상향 같은 곳. 지하 1층부터 지상 4층 규모로, 4층의 전시 공간과 2, 3층의 공연장, 1층의 북카페 ‘카페 모음’, 그리고 지하의 영화관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가장 주목할 곳은 바로 영화관이다. 영화를 업으로 하는 사람들이 만든 영화관이라니. 그것도 굵직굵직한 한국 영화계의 역사를 써온 제작사에서 만든 공간이니 얼마나 심혈을 기울여서 공간을 설계했을지 안 봐도 짐작이 가는 부분. 일단 영화에 몰입할 수 있는 최적의 하드웨어를 구축했다. 디지털 4K 영사 시스템과 마스킹 시스템, 돌비 애트모스 3D 사운드 시스템은 국내 최고 수준을 자랑한다고. 실제로 베니스국제영화제 황금사자상을 받은 영화 <로마>나 박찬욱 감독의 <헤어질 결심> 같은 영화는 명필름아트센터에서 관람했을 때와 OTT 플랫폼에서 관람했을 때의 차이가 하늘과 땅만큼이나 달랐다. 로마에서 초반 타일 바닥에 물 뿌리는 소리나, 멕시코시티 도시의 소음이 얼마나 생생하게 살아나는지, 또 <헤어질 결심>의 마지막 장면에서 공간을 뒤덮는 파도 소리가 얼마나 처연하고 압도적인지 명필름아트센터에서 관람하지 않았다면 이 몰입감을 경험하지 못했을 것이다. 영화라는 장르를 향유하는 방식에 관해서도 다시금 생각하게 만드는 공간. 이곳에서는 감독이 의도한 음향, 화면 연출 등의 영화적 장치들을 그야말로 120% 오롯이 만끽할 수 있다. 그렇게 섬세하게 길러진 관객들의 미감은 완성도 높은, 조금 더 벼려진 감각의 영화들을 세상 밖으로 이끌어낼 것이다. 즐거운 선순환이다.

넓은 좌석 간 거리, 시야를 전혀 가리지 않는 각 열의 높낮이, 청량한 공기까지 명필름아트센터 영화관은 그 어떤 영화관보다 정중하고 쾌적하게 관객을 맞는다. 문제는 이곳에서 영화를 보기 시작한 이래 다른 영화관에는 도통 갈 수가 없다는 것. 주말에만 상영하기 때문에 영화를 보려면 토요일이나 일요일을 빼야 한다. 한두 편의 영화를 보고 1층에 있는 카페 모음에서 지난 한 주를 정리하고 다가올 한 주를 준비하는 것. 덕분에 파주행이 나의 주말 루틴이 되었다.
명필름아트센터의 또 다른 매력은 다양하게 큐레이션 하는 기획전에 있다. 오랫동안 관람 기회를 놓친 양영희 감독의 2006년작 다큐멘터리 <디어 평양>,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에서 호평받은 김지운 감독의 <차별> 등을 만난 것도 명필름아트센터의 기획전 덕분이었다. 이 두 편의 다큐멘터리를 통해 우리나라 역사의 한 부분인 재일조선인 문제에 관해서 완전히 다른 시각을 가지게 되었다. 기획전은 명필름 황다진 프로그래머와 심재명 대표가 함께 구상한다고. 영화 잘 아는 언니들이 내 취향에 딱 맞는 영화들만 큐레이션 해주는 기분이랄까. 걸크러시전, 장국영 20주기 추모상영 기획전. 디자인과 영화전 등 매달 다양한 프로그램들이 관객들을 맞이한다.
이 글은 '주말마다 나는 파주로 향한다 (1): 명필름아트센터'에서 이어집니다.
- 소개
김선미
서울 북아현동에서 기획 및 디자인 창작집단 포니테일 크리에이티브를 운영하고 있다. 단행본 <친절한 뉴욕>, <친절한 북유럽>, <취향–디자이너의 물건들>, <베이징 도큐멘트>를 썼으며 한겨레신문, <샘터> 등에서 디자인 칼럼니스트로 활동했다. 현재 1930년대 한국 근대 잡지에 관한 단행본을 집필 중이다.
글. 김선미 | 사진. 양경필·명필름아트센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