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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312 에세이

그림에서 벗어나 내가 된 나에게 묻다

2023.12.02

학력인정 위탁교육과정을 운영하는 ‘오디세이학교’를 경험한 네 명의 청소년이 지금의 관심사에 대한 글을 보내옵니다. 고등학교 1학년 보통교과 시수를 최소화한 1년의 교육과정을 함께 경험한 이들은 지금 어떻게 세상을 알아가고 있을까요?


그림을 그려 먹고살 수 있겠다고 생각하던 시절이 있었다. “그리고 그건 중학교 2학년 때의 이야기예요.” 얼마 지나지도 않은 일인 것 같은데 벌써 이렇게 훌쩍 커버렸다. 지난 기억을 훑어본다. ‘음… 그럼 좀 쉽게 가볼까요? 그림은 언제부터 그리기 시작하셨어요?’ 나는 나에게 물어보기로 했다. 스스로에게 묻고 답하다 보면 알게 되겠지. “초등학교 6학년, 친한 반 친구들의 그림을 보고 ‘나도 그 애들만큼 잘 그리고 싶다.’는 마음 하나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어요. 무언가를 잘하고 싶어서 시작한 취미는 그림이 처음이어서인지, 이상하게도 저는 그림을 그릴 때보다(물론 즐거웠지만) 열심히 그린 그림에 ‘좋아요’가 붙을 때 훨씬 기뻤습니다. 댓글에 칭찬이라도 달리면 하늘을 날아갈 듯했어요.”

부끄럽지만 나는 또래 친구들에게 천재라는 말까지 들어본, 그림을 꽤 잘 그리는 학생이었다. 그림은 내게 취미라기보다 하나의 인생 성공 프로젝트에 가까웠다. “그때의 저는 재밌게 그리기보다는 더 잘 그리고 싶었거든요. 해냈다는 성취감, 성장하고 있다는 뿌듯함, 나도 뭔가 잘하는 게 있다는 것을 실감할 때마다 밀려오는 보람찬 안도감 같은 것들이 저를 자극했고, 다시 달릴 수 있게 해주었어요. 점점 발전해가는 그림 실력에 ‘아, 나중에 커서 나도 한자리하겠구나.’라고 생각했던 걸 보면 그림은 저를 증명해주는 수단이자 저의 가능성을 신뢰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이기도 했네요.”

안정과 칭찬 외에 필요했던 것
사춘기의 초봄을 거쳐 개화한 그림이라는 취미 아닌 취미. 잘 그린 그림을 통해 사람들에게 사랑받고 싶었던 나. 하지만 그 불안정한 정체성은 얼마지 않아 흔들리기 시작했다. 어떻게든 감춰보려 애썼지만 기초가 없으니 곧 본 실력이 드러났다. “인정과 칭찬이 저의 원동력이었는데, 사실 그럼 안 되는 거였죠. 그림을 진짜 좋아하는 친구들이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갈 때 저는 뒤처지기 시작했어요. 못 그리는 걸 인정하기 싫은 게 가장 컸고, 무엇보다도 제가 ‘그리고 싶은 것’이 없다는 걸 마주하는 게 두려웠어요. 평생 남들의 인정을 받기 위한 예쁘고 반짝거리는 그림만 그렸는데 이젠 그게 먹히지 않는다니 열심히 그릴 이유가 사라진 거죠. 왜 그려야 할지도 모르겠고, 연습을 미루고, 기초를 미루고, 게을러지고. 외면하고 외면하다 결국 합리화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어차피 제 길은 그림이 아니라고요. 그림은 단순히 ‘취미’일 뿐이라고. 그렇게 자신만만하던 저는 없고 감히 현실과 타협한 척, 최선을 다해 외면했죠.”

난 여전히 그림이 좋아
열심히 노력했더니 어느 순간 그림이 싫어졌다. 이유는 정확히 알 수 없었지만 마음이 이끄는 대로 했다. 세 달간 펜을 잡지 않았다. 늘 책상 앞에 놓여 있던 태블릿을 처음 배송된 포장 그대로 상자에 넣어 방구석에 처박았다. 처음에는 또 슬럼프인가 싶었지만 이번엔 다르다는 걸 깨닫기까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렇게까지 오래 그림 그리기를 쉬어본 적은 처음이었는데 사실 많이 두려웠어요. 펜을 잡으면 손이 덜덜 떨릴 만큼. 당시에 쓴 일기를 보면 알 수 없는 공포에 울고 있는 제 모습이 보여요. 색칠이라는 단어만 들어도 무서워서 눈물이 날 정도였어요. 그런 나날이 영원할 줄 알았는데, 지나고 나서 돌아보니 생각보다 얼마 안 되더라고요. 왠지 허무하기도 하고, 다행이기도 하고….”

그러다 작년 4월, 나는 다시 돌아와 펜을 잡았다. 고등학생이 되고 난 후의 이야기다. 이유는 단순했다. ‘그리고 싶은 게 생겨서.’ 그림에 대한 꿈은 진즉에 포기했다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미련이 남아 있었다. 이제 더 즐겁고 순수하게 그림을 그리고 있다. 이제는 정말 아무렇지 않다. “많이 괜찮아졌어요. 안정화됐다고 해야 할까요?(웃음) 지금의 저는 사람들이 아무도 인정해주지 않더라도 크게 흔들리지 않을 자신이 있습니다. 그럴 필요가 없다는 걸 깨달으니 그림 그리기를 좋아한 그 마음만 남더라고요. 왜 그때는 이 중요한 걸 알지 못했을까요. 그리고 싶은 게 이렇게나 많았는데.”

더 이상 간절하지 않다는 게 어딘가 씁쓸하기도 하지만, 열정이 예전 같지 않다고 애정이 줄어든 적은 없었다. 여전히 나는 화폭 속이 포근하고 좋다. 틀에 박힌 캔버스는 모든 외부의 위험에서부터 나를 지켜주고 나는 여전히 현실과 예술의 경계를 들락거린다. 내 안에는 예술이 있다. 또 다른 꿈이 있다. 대신 그런 나의 곁에는 언제나 그림이 있다.

소개

해민
고3을 앞두고 생각이 많아지네요. 안녕하세요, 해민입니다. 고민을 풀어낸다는 뜻에서 스스로 ‘해민’이라는 이름을 지었더니 매일같이 고민거리가 쏟아져서 고민입니다.


글 | 그림. 해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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