돋보이는 독창성으로 제28회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의 개막작으로 선정된 〈러브 라이즈 블리딩〉은 크리스틴 스튜어트가 주연을 맡아 화제가 된 작품이다. 흥행 시리즈 〈트와일라잇〉에서 벨라 역할을 맡아 스타덤에 오른 크리스틴 스튜어트는 이후 영화 〈스펜서〉, 〈클라우즈 오브 실스마리아〉 등 다양한 장르를 소화하며 캐릭터에 대한 깊은 통찰력을 증명해냈다. 각본을 쓰던 단계에서부터 루 역으로 크리스틴 스튜어트만을 떠올렸다는 감독의 눈이 틀리지 않았음을 증명하듯 그녀는 약자이지만, 운명적으로 만난 잭키와의 만남을 계기로 변화하며 자신과 잭키를 둘러싼 폭력에 강력하게 맞서는 체육관 매니저 루를 완벽하게 표현해냈다. 북미 개봉 전 진행된 크리스틴 스튜어트의 공식 인터뷰를 아래에 옮긴다.
정리. 김윤지
로즈 글래스 감독에게 루 역할을 연기해달라는 제안을 받고 어떤 생각이 들었나요?
로즈 글래스 감독의 데뷔작인 〈세인트 모드〉를 정말 재미있게 봤어요. 어느 호러 영화제의 마지막 프로그램으로 우연히 보게 된 건데, 이게 데뷔작이라는 게 믿기지 않더라고요. 웃기기도 하지만, 매우 진지하고, 직설적이고, 정말 무서운 영화거든요. 그러던 중, 로즈 글래스 감독이 저한테 연락을 해왔어요. 자기가 지금껏 스튜디오, 프로듀서, 그리고 다음 영화를 구상하라는 사람들과 만나며 나눈 대화를 바탕으로 떠올린 아이디어가 있다면서요. ‘우리 강한 여성에 대한 영화를 만들어봐요. 강한 여성이 만드는 강한 여성에 대한 영화가 필요한 시대잖아요.’처럼 피상적인 대화가 주로 오갔다고 하더라고요. 맞는 말이지만, 깊이도 없고 나이브한 접근이죠. 로즈 글래스 감독은 이 영화를 통해 불손한 방법으로 그 생각을 완전히 뒤집어버린 거예요.
루라는 캐릭터에 대한 생각도 궁금합니다. 영화에서 자주 찾아볼 수 없었던 타입의 주인공이잖아요.
아이러니하게도, 전 전혀 강하지 않은 약자이자, 여성 혐오를 내면화해 마비된, 한마디로 시대에 갇혀 있는 인물을 연기하게 됐어요. 루는 80년대의 한 폭력적인 가정에서 자랐고, 퀴어이자 아웃사이더예요. 루 같은 영화 주인공은 흔치 않아요. 이게 중요한 이유가, 대다수의 퀴어 러브스토리나 안티 러브스토리에는 내재화된 퀴어라는 수치심과 생존을 위해서 해야만 하는 자아 확립이 여전히 존재해요. 사실 전 루와 잭키가 계속 만나야 할지 판단이 안 서기 때문에 이 영화가 러브스토리인지 잘 모르겠지만요. 어쨌든 루는 아빠와 트러블이 있고 가족에 발이 묶여 고향도 떠나지 못하는 나약한 사람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적어도 자신이 누구인지는 알고 있어요. 그런 모습을 전면으로 내세운 영화를 보는 건 재밌는 일이에요. 제대로 알지도 못하는 사람과 가까워지기 위해 나쁘고 극단적인 행동을 정당화하고 합리화하는 사랑에 대한 이야기를 루를 통해 들려줄 수 있어서 기뻤어요.
잭키 역의 케이티 오브라이언은 보디빌딩 경력과 배우 경력을 모두 갖춘 배우예요. 그녀가 표현해낸 잭키는 어땠나요?
잭키는 강인함 그 이상이 필요한 캐릭터예요. 잭키가 처음 체육관에 들어설 때 루가 시선을 빼앗긴 건 그런 광경은 루에게 난생처음이기 때문이에요. 그 동네 여자들이 가지고 있는 특정한 스타일이 있고, 그들에게 주어진 한정적인 역할도 있으니까요. 케이티는 진중하고, 강렬하고, 아름다운 에너지를 잭키 캐릭터에 불어넣었지만, 잭키에겐 굉장히 끔찍한 면도 있어요. 루와 잭키 모두 자신을 착한 사람이라 생각하고 싶어 하지만, 곧 인간은 필연적으로 괴물이 될 수 있단 사실을 깨닫죠. 케이티는 이 모든 걸 훌륭하게 연기해냈어요. 보디빌딩 경력도 있긴 하지만, 자신의 진짜 힘을 알고 있는 사람이에요. 원하는 걸 얻기 위해 노력하고 믿는다는 것이 어떤 건지도 알고 있고요. 이건 굉장히 현실적인 곳에서 비롯됐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극 중 잭키가 느끼는 배고픔과 갈증도 더욱 생생하죠. 어렵고, 강렬하고, 복잡한 영화인데 모든 걸 아름답게 표현해낸 케이티가 너무 자랑스러워요.
에드 해리스와 부녀 연기를 한 소감은 어땠나요?
에드 해리스가 촬영장에 들어오는데 제 아버지와 똑같은 머리 모양을 하고 있어서 처음엔 저를 놀리는 줄 알았어요.(웃음) 트리거가 눌린 듯했죠. 저는 아버지를 사랑하지만, 누구나 그렇듯 부모님과의 관계가 복잡한데, 이렇게 닮았다니 정말 기분이 이상했어요. 그리고 에드는… 에드 해리스잖아요. 이 이상한 영화를 만드는 데 에드 해리스가 참여하겠다고 한 게 믿기지 않았어요. 이제는 누구보다 이 영화를 사랑하지만, 사실 이 영화가 잘 나올까 반신반의했거든요. 촬영하면서도 에드 해리스와 같은 시공간을 공유한다는 게 믿기지 않았어요. 에드 헤리스는 전설이잖아요.
1980년대의 미국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는 것도 영화에서 주목할 만한 부분이에요.
영화를 보면서, 단순히 80년대를 배경으로 한 게 아니라 80년대에 만들어진 영화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대담한 섹슈얼리티가 담겨 있는데, 요즘 세상은 여기서 많이 멀어졌죠. 이상하리만치 얌전을 떠는 분위기가 지배적이에요. 어느 시대나 진보가 가속화될 때에는 항상 그 움직임에 대한 분노가 쏟아져 나와요. 지금도 본능적으로 그런 흐름이 느껴지고요. 그런 흐름이 만들어낸 웃기면서도 무서운 영화의 분위기가 기괴한 느낌을 준다고 생각해요. 무섭다는 게, 공포 영화라는 뜻이 아니라 인간들 자체가 세상의 입장에선 무서운 이야기니까요. 영화를 보다 보면 마치 장례식장에서 웃고 있는 것 같기도 해요. 웃기지만 비열하지는 않은 영화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