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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326 에세이

2030의 오늘은 - 새로운 동화

2024.08.26

글. 신지아

저녁을 먹고 남편과 쇼츠를 넘겨 보다 재밌는 장면에 멈춰 섰다. 다람쥐와 뱀의 조마조마한 대치였다. 고개를 쳐든 뱀을 발견하고도 다람쥐는 한 치의 물러섬이 없다. 뱀에게 먹힐까 마음 졸인 것도 잠시, 놀랍게도 다람쥐는 뱀의 머리를 낚아채 우적우적 씹어 먹는다. 실제 다람쥐를 자세히 봤다가 상상하던 다람쥐와 다른 이미지에 놀랐던 기억이 났다. 작은 입을 오물거리며 재잘거리는 동화 속 귀여운 다람쥐와 전혀 달랐다.

“나 다람쥐 가까이서 봤었는데, 너무 쥐 같아서 징그럽더라고, 쥐는 역시 쥐야.” 남편이 나에게 물었다. “여보, 실제로 쥐 본 적 있어?” 혼란스러웠다. ‘이게 무슨 질문이지? 쥐를 본 적이 없는 것일까?’ 단순하지만 황당한 질문이라 해석할 시간이 필요했다. 나는 대답했다. “여보, 나는 쥐랑 살았지.”

사업을 하던 우리 집은 IMF를 정면으로 맞았다. 월급을 받지 못한 이들이 찾아와 이부자리를 구둣발로 짓밟던 새벽도 있었다. 날이 밝으면 울며 학교에 갔다. 학교에서 돌아오면 빨간 딱지가 TV와 냉장고, 소파에 붙어 있었다. 집은 빚 청산을 위해 처분되고 우리 가족은 친척 집으로 뿔뿔이 흩어졌다. 우여곡절 끝에 함께 살 수 있는 집이 마련되었지만 그곳은 쥐들에게도 보금자리였다. 지붕 어느 틈에 살고 있는 쥐 때문에 천장은 곳곳이 쥐 오줌으로 노랗게 물들었다. 날마다 쥐들은 나무 천장을 신경질적으로 긁어댔다. 키 작은 나는 파리채 손잡이를 세워 천장을 쿵쿵 두드렸다. 층간소음을 일으키는 쥐들에게 던지는 엄중한 경고였다. 알아듣는 것인지 쥐들은 잠시나마 숨을 죽였다.

욕실 수챗구멍으로 빼꼼히 얼굴을 내미는 쥐를 보기도 했다. 샤워하다 말고 기회를 놓칠세라 바가지로 뜨거운 물을 퍼부었다. 어린 마음에 살기가 가득했다. “죽어! 죽어!” 이렇게 알몸으로 쥐와 싸워온 나에게 쥐를 본 적이 있느냐니, 살면서 받아본 가장 참신한 질문이었다. 남편은 군대에서 처음 쥐를 보았다고 했다.

쥐에게 뜨거운 물로 세례를 베풀며 맨몸으로 싸웠던 여중생은, 군대 가서 쥐를 처음 보고 ‘혼이 나갈 뻔했다’던 어떤 남자와 살고 있다. 신혼집 이사 첫날, 어느 짐 상자에서 딸려 온 듯한 바퀴벌레의 등장에 짐짓 의연한 척하는 남편을 보았다. 나는 벌레를 때려잡으려 반사적으로 뻗쳐지는 내 손을 제어하느라 애썼다.

바퀴벌레야, 테니 잠깐만 거기 있어봐

“여보 잠깐만 기다려봐.” 촌각을 다투는 이때 그는 나와 바퀴벌레를 남겨두고 편의점으로 약을 사러 나갔다. 아파트 정문까지 나가야 하는 거리였다. 의기양양하게 돌아온 그의 손에는 빨간색 바퀴벌레용 스프레이가 들려 있었다. 다른 한 손에는 이 상황과 어울리지 않아 보이는 파란색 모기 퇴치 스프레이도 있었다. 약이란 약은 다 쓸어 오려던 그의 간절함이 묻어났다.

든든한 무기를 장전한 그는 화염방사기를 뿌리듯 온 집 안 틈새에 스프레이를 쏘아댔다. 숨어 있던 벌레가 약을 맞고 퍼덕거리며 날아올랐다. 화들짝 놀란 남편도 같이 뛰어올랐다. 이제 때려잡아야만 하는 순간이었다. 나는 조용히 그의 뒤에서 공책 하나를 내밀었다. 마무리를 지을 확실한 장비였다. 바퀴벌레 한 마리를 잡는 일이 예상보다 길었고 꽤 요란했지만, 그만큼 누군가의 등 뒤에서 오래오래 있어보는 기분도 괜찮았다. 내게는 낯설고도 새로운 포지션이었다.

지난날을 돌아보면 마음도 몸도 쉴 틈 없이 애쓰며 악쓰며 지내온 듯한 시간이었다. 매사에 두 팔 걷어붙이고 씩씩하게 해결사처럼 나서기에 바빴던 나였다. 유난스럽게 손가락셈을 하며 단돈 몇 천 원에 희로애락을 펼치곤 했다. 고운 손으로 반짝반짝 윤이 나는 도토리를 들고 있는 다람쥐가 되고 싶었는데, 뱀과 대치하느라 투지와 맷집을 단련한 기세 좋은 다람쥐였다.

잠시 그의 등 뒤에 있는 동안, 이제는 내가 힘들 때 한숨 돌릴 수도 있다는 걸 알았다. 게다가 신혼집 입성 첫날이 아니었던가. 동화 속 어느 장면에 나를 그려 넣어보았다. ‘씩씩한 척 앞장서지만 말고, 누군가의 등 뒤에서 놀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고개만 빼꼼 내미는 귀여운 다람쥐도 돼봐야지.’

다짐이 무색하게도 나는 곧장 그가 ‘과하게’ 사 온 모기 퇴치제를 환불하러 간다. 내 몸에 착 감기는 억척스러운 생활인의 옷을 바라보고 피식 웃는다. 나도 모르게 벗어버린 동화 속의 옷이 편안해지려면 시간이 걸리는가 보다. 다시 주섬주섬 그 옷을 주워 입어본다.

‘어색해도 잘 입고 있어보자. 이제 내게도 동화 같은 이야기가 시작되고 있으니까.’

* ’사단법인 오늘은’에는 아트퍼스트 에세이 프로그램을 통해 마음챙김을 하고 있는 청년들이 있습니다. 매주 글을 쓰고 나누며 얻은 정서적 위로를, 자기 이야기로 꾹꾹 눌러 담은 이 글을 통해 또 다른 대중과 나누고자 합니다.


신지아

평범한 일상에 숨은 보석 같은 이야기를 길어 올리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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