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유지영
“벌써 10월입니다.”라는 말에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10월은 내가 태어난 달이다. 그리고 1년 중 내가 사는 서울이 가장 아름다운 색으로 물드는 달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날 모인 이들에게는 10월이 전혀 다른 의미로 부딪힌다. 어쩌면 진도의 4월이나 광주의 5월과 비슷할까. 도저히 마주치고 싶지 않은 달, 그러나 매년 마주쳐야 하는 달, 날씨가 좋아 나들이를 가려다가도 문득 사무치는 달.
10월의 이날도 어김없이 날씨가 무척 좋은 날이었다. 햇살은 쨍했고 새가 지저귀는 소리마저 선명하게 들리는 맑은 날이었다. 이런 날 참가자가 많이 올까? 이태원 참사 2주기를 맞아 유가족협의회에서 토요일에 연 ‘시민들과 주말걷기’에 참여해 청계천을 걷기로 했다. 노트북은커녕 가방도 없이 왼쪽 주머니엔 지갑, 오른쪽 주머니엔 휴대전화를 넣고 시원한 물을 채운 텀블러를 들었다.
걱정이 무색하게 출발 장소인 서울 중구로 옮긴 10.29 이태원 참사 기억소통공간 ‘별들의집’에 들어서자 꽉 찰 정도인 120여 명의 시민들이 유가족과 함께 하는 주말걷기에 참여하고자 모여 있었다. ‘별들의집’이 좁을 지경이었다. 다들 “정말 많이 왔다”고 연신 말하면서 손 인사를 건넸다. 익숙한 얼굴이라도 보이면 그제야 안도하면서 긴장하는 어깨를 내리곤 하는 이들의 웃는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기사를 쓰지 않을 작정이었다. 기사를 쓰는 기자가 아닌 이태원 참사에 슬퍼하고 연대하는 시민으로 참석하고 싶었다. 노트북에 얼굴을 푹 파묻고 오로지 귀에 들리는 말만 쏜살같이 적어 내려가다가 노트북을 들지 않는 손이 오갈 곳 없어 어색했다. 대신 이날 참여한 시민들의 얼굴은 훨씬 더 잘 보였다. 이들은 때론 날씨가 좋은 탓인지 화창하게 웃다가도 때때로 참사 유가족이나 참가한 시민들의 연대 발언을 듣고서는 그늘을 드리우기도 했다.
유가족들은 이제 따로 준비하지 않아도 마이크만 잡으면 막힘없이 말했다. “2년 정도 되니 이제는 막 시켜도 잘하시더라고요.” 담당자는 너스레를 놓으며 머쓱하게 웃었다. 그가 말하는 2년은 단순한 시간의 흐름이 아닌 것이다. 그것은 2년간 유가족의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는 뜻이고, 그렇게라도 턱턱 말하지 않으면 들어주지 않아 단련된 초능력에 가까웠다.
청계천을 걷는 참가자들에게는 10월 26일 이태원 참사 2주기 시민추모대회 포스터를 붙이는 일과 작은 보라색 리본을 청계천을 지나가는 시민들에게 건네는 소일거리가 부여됐다. 포스터는 보통 여럿이서 온 참가자가 맡았고, 나는 홀로 왔기에 리본을 건네는 일을 맡게 됐다.
내성적인 성격 탓에 작은 리본이지만 모르는 이들에게 건네고, 또 거절당하는 일이 쉽지 않았다. 내게는, 참가자들에게는 큰 의미가 담긴 리본이었으나 이날 청계천을 지나는 이들은 대부분 거절했다. 한번은 리본을 내밀었는데 상대방이 몸을 피해 리본이 땅으로 떨어지기도 했다. 리본을 주워서 툭툭 털고 아무렇지 않다는 듯 돌아섰지만 자주 어깨가 웅숭그렸다.
리본에 담긴 추모의 마음
주말 오전 청계천에는 달리기를 하러 나온 이들이 많았다. 유가족이 모인 데 응원을 보내면서 힘차게 주먹을 들거나 조심스레 손을 흔드는 이들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주말걷기에 나선 참여자들로 인해 안 그래도 좁았던 천변 길이 더 좁아져 달리는 진로에 방해되자 욕부터 내뱉는 이들도 있었다. 최근에는 이토록 불특정한 시민들의 적나라한 얼굴을 볼 일이 많지 않았다. 노트북을 덮고 나니 비로소 이들의 얼굴이 보였다.
자꾸 그들과 커다란 벽으로 가로막힌 듯한 상상이 들었다. 그건 고립감이었다. 그들에게 전해지지 않는 건 리본이 아닌 추모의 마음이었다. 그럴 때면 청계천은 놀랄 정도로 진한 보라색 나팔꽃을 보여주었다. “아, 보라색 나팔꽃이 피어 있어요.” 나는 말했다. 왜인지 유가족들에게도 이 나팔꽃을 보여주고 싶었다. 유가족들과 참가자들 몇몇과 활짝 핀 나팔꽃을 바라보았다. 청계천을 걸어가는 동안 나팔꽃은 자주 모습을 보였다. 나팔꽃에 기대어 내 오른손에 꼭 쥐었던 리본 몇 개는 이름 모를, 그러나 이태원 참사에 슬퍼할 어느 시민들의 손에 들어가는 것으로 그 소임을 다했다.
다른 참가자가 나눠 준 가을 귤을 손에 꼭 쥐고 지하철을 탔다. 이름 모를, 그러나 얼굴은 아는 유가족에게 2주기 시민추모대회에 아무 일 없이 가겠노라고 약속했다. 가서 보라색 리본을 받기로, 그래서 보라색 나팔꽃이 되기로 했다. 집에 와서는 미처 다 전해지지 못했던 보라색 리본 몇 개를 온갖 가방에 달았다. 이 리본을 볼 때면 당분간은 청계천에 핀 나팔꽃을 떠올릴지도 모르겠다.
유지영
〈오마이뉴스〉 기자. 팟캐스트 〈말하는 몸〉을 함께 만들고 동명의 책을 썼다. 사람 하나, 개 하나랑 서울에서 살고 있다. [email protect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