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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326 컬쳐

슬기로운 문화생활 - 겸손함과 자부심에 관하여

2024.08.26

전시 〈모델하우스: 역설적 공간 활용〉

글 | 사진제공. 배민영

겸손에 대한 이야기는 종종 우리에게 중요한 고민으로 다가온다. “이 바닥 겸손해야 된다”는 대사가 밈처럼 쓰이거나 “겸손은 힘들어”라는 노래 제목이자 후렴구가 한 인기 정치 채널 이름으로 패러디되는 것을 보면서도 그 가치가 갖는 무게와 딜레마를 느끼게 된다. 그러다 보면, 겸손해야 하는 건 잘 알겠지만 ‘이 상황에서(도) 겸손하게 보이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싶은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얼마 전 수잔 그리핀의 〈여백으로부터 글쓰기〉(신예용 옮김, 상상스퀘어 펴냄, 2024)라는 책을 읽다가, ‘겸손한 작업’이라는 소제목의 글에서 ‘작가의 삶이 때론 번뜩이는 영감으로 술술 풀리게 되는 것들도 있지만, 대개는 느리고 성실하게 살아가며 그것을 유지해야만 기적과 같은 일도 일어난다.’고 요약할 수 있는 부분을 곱씹어보게 되었다. 직업적으로 글을 쓰는 입장에서 참 공감이 되는 대목이었고, 컴퓨터 앞에 앉으면 금세 글을 써내는 편임에도 사실 그 앞에 앉기까지 얼마나 많은 고민을 하는지 모른다는 토로를 오랜만에 해본다. 정말이지 걸으면서도, 또 꿈에서도 구상을 해야 할 때가 많다.

시각예술을 하는 이들은 어떨까. 요 며칠 지난달의 큰 전시가 하나 끝나고 작가들의 작업실을 계속 가게 되었다. 그들 역시 늘 바쁘다. 어떤 공동 작업실에서는 유명 브랜드에서 인테리어형 오브제 제작 의뢰가 들어와 일주일째 집에도 못 가고 그걸 해내면서 얼른 끝내고 자기 작업을 하고 싶다고 말하는 말을 듣는다. 그의 작업을 정말 좋아하지만 평소 너무 겸손해서 쉽게 친해지지 못해온 작가인데, “세 달은 줘야 하는 작업을 한 달 안에 해달라고, 갑자기 들어와 어쩔 수 없이 이렇게 하고 있어요. 그래도 뭐, 한 달 안에 버는 걸로는 큰돈이니까요.”라고 약간 투덜거리는 것을 보며 오히려 굉장한 해방감을 느꼈다. 자기 작업을 못 하고 있는 상황에서 어쩔 수 없이 노출하게 되는 자기 작업에 대한 애착과 자부심이랄까.

사실 자부심은 겸손함의 반의어가 아니다. 그리고 자부심은 태도이기 전에 심리이고, 겸손함은 심리이기도 하지만 태도에 가깝다. 따라서 자부심은 작가의 태도와 관계없이 작업 자체에서 혹은 그를 둘러싸고 있는 여러 상황을 통해 읽히는 경우도 많고, 겸손함은 그보다는 작가의 태도를 봐야 한다. 물론 당장 한두 번 어떤 말투나 행동을 한다고 해서 그게 다라고 할 수는 없다. 중요한 것은 앞서 소개한 책에서도 말했듯 그가 보여주고 있는 성실한 속도일 테니까. 그렇기에 자부심과 겸손함은 상충되기보다는 같이 가면 참 좋은 것들이다. 주변에 그런 작가들이 많아 늘 배우게 된다.

이진구, BIG HOP, Stainless steel, urethane paint, 250x220x210(h)cm. 2024

작가를 통해 깨닫는 것들

알게 된 지는 얼마 안 됐지만 자부심과 겸손함을 잘 보여주는 젊은 작가가 마침 이달 개인전을 열고 있어 꼭 소개를 하고 싶었다. 현재 목원대학교 조소과 4학년에 재학 중인 이진구 작가가 〈Road to Heterotopia〉라는 타이틀로 1일부터 27일까지 가산디지털단지역 앞 이랜드갤러리에서 자신의 생각과 색깔을 선보인다. 올봄 〈2024 브리즈 아트페어〉에서 신진작가를 보여주는 ‘NEW’ 기간에 처음 만난 작가의 작업들은 압도적인 크기의 조각과 그에 대한 미니어처적인 작업의 조화가 보여주는 재미와, 움직이는 대상을 포착해 역동적이면서도 다양한 각도에서 충분히 감상할 수 있도록 하는 묘사력, 그리고 전통 문양, 파스텔 톤 등 기존의 조각에서는 잘 입히지 않는 시각 요소와의 창의적 결합이 돋보였다. 그래서 당시 기획을 맡아 준비 중이던 서울함 특별 전시〈CRAFT+MAN=SHIP〉에 승선하자고 제안했고, 6월에 있었던 해당 전시에서는 갑판 위에 우크라이나 소년이 갈비는 뼈처럼 철근이 드러나고, 철모를 쓴 채 뒤로는 해바라기를 숨기고 있는 대형 조각을 세워놓음으로써 수많은 관람객들의 주목을 끈 바 있다. 특히 전시 기간 중 국제적인 행사도 있어 외국인들도 방문하고 외교부에서 공식적으로 통역 지원까지 해 이진구 작가가 작업을 설명할 기회도 있었는데, 차분하면서도 적절한 분량과 핵심을 설명하는 모습에 ‘나는 저 나이 때 저만큼 했던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아트페어와 특별 전시는 수십 명의 작가들이 함께하는 단체전이었다면, 이번 개인전은 그야말로 자신의 세계를 한껏 펼쳐 보이는 자리인 만큼 더욱 기대된다.

전시 〈모델하우스: 역설적 공간 활용〉

그런가 하면, 원래는 회화 작업으로 알고 지내던 동양화 기반의 추상 화가인 이원석 작가가 이번에 N2아트스페이스에서 단체전 〈모델하우스: 역설적 공간 활용(Model house: Paradoxical Space Utilization)〉을 기획, 또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어 소개하고자 한다. 작가 일곱 명과 디자이너 일곱 명으로 총 14명(Becky Alp, Joseph Gallina, 곽종범, 권도연, 박미솔, 송동환, 유도헌, 이원석, 이유진, 이효정, 정성진, 정희주, 조희수, 최민솔)이 참여하는 이 전시는 지난 7월 19일에 오픈해 이달 22일까지 열리고 있다. 그런데 긴 제목이 무척 흥미롭다. 이원석 작가는 전시 기획 의도를 통해 “주거 공간의 분양을 위해 한시적이고 임의적으로 가짜 공간을 만들어 선보이는 상업 공간으로서의 모델하우스 콘셉트와 매칭했다.”고 설명하면서 “갤러리에서의 일반적인 디스플레이인 작품 위주의 디스플레이보다 가구와 다양한 작품들을 믹스매치 해 공간을 모델하우스처럼 만들어보려 한다.”고 포부를 밝혔다. 좀 어렵게 보일 수 있지만 기획 의도를 좀 더 들어가보면, “예술이 오늘날 ‘전시가치(Ausstellungswert)’는 높아졌는데 ‘제의가치(kultwert)’가 점점 줄어들었다. 여기서는 그 실재성이 더욱 강조되면서 두 가치가 동반 상승한다.”고 말하고 있는데, 이는 ‘모델하우스’가 가상현실(virtual reality)을 물리적으로 경험할 수 있는 “역설적 공간 활용”이며 과거로부터의 전형과 미래에 대한 제안 사이에 놓인 ‘현재’로서 전시의 근원적 의미를 보여준다고 풀이할 수 있다.

전시 〈모델하우스: 역설적 공간 활용〉

N2아트스페이스의 디렉터를 맡고 있는 필자는 처음 제안서를 받자마자 ‘모델하우스’라는 제목부터 이러한 발상과 의지가 마음에 쏙 들었다. 왜냐하면 이는 ‘전시란 무엇인가’에 대한 작가의 고민인 동시에 기획자로서 시대를 읽으려 하는 탐구심이기 때문이다. 그 안에는 겸손함과 패기 사이의 고민이 있고, 또한 자부심과 호기심을 오가는 예술인 집단이 서로 어떻게 어우러지려고 하느냐를 잘 보여주는 장이기에, “디자인은 ‘세상이 원하는 것’을 만들고, 예술가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만든다는 것에서부터 시작하지만, 이번 전시에서는 예술가적 주체가 된 디자이너, 공간과 디자이너들이 원하는 것에 맞추는 예술가가 되어본다.”는 설명도 인상적으로 다가온다.

〈REVOLVE〉 산업디자인 전시, 〈Project 7+7 : 디자이너와 인공지능의 협업〉 전시 등에 기획 및 참여를 한 경험을 바탕으로 권도연 공동 기획자이자 디자이너는 “방이 많고, 2층으로 올라가는 독특한 구조의 집과 사옥 중간쯤의 N2아트스페이스가 화이트 큐브로의 변신을 한 데서 나아가 모델하우스로 탈바꿈한 기간 많은 가능성을 공유하고 싶고, 기능, 소재, 가격, 보관, 유통 등 작품이자 제품일 수 있는 디자인의 영역이 어떤 고민과 성취 속에 있는가를 보여준다.”며 “국내에 이러한 공간 디자인 중심의 전시가 부족하다 느껴왔으나 앞으로 많아지기를 바란다.”고 밝혔다. 관찰력과 상상력을 현실적 고민과 잘 연결하면서도, 기획자로서의 소신과 포부가 느껴진다.

그렇다. 예술인이라면 자신의 작업에 대한 성실함은 기본이고, 앞으로의 예술 공간에 대해 예상해보는 공론장을 마련해볼 필요도 있다. 그러려면 겸손한 태도를 겸손함 그 자체로만 보여줄 것이 아니라 자부심과 용기로 연결해보는 것도 필요하다. 왜 우리가 굳이, 소위 ‘보여주는 삶’을 택했겠는가. 조금은 나태해지거나 위축되었을 때, 이 글이 다시 환기하게 하는 ‘여백’과 같은 역할을 했으면 좋겠다.


배민영

아트 저널리스트이자 누벨바그 아트에이전시 대표. 기획과 평론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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