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자립의 기둥들 (1)'에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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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서적 기둥
내가 실망을 표하자 그는 자신이 자식에게 기대지 않고 세 번째 부인과 잘 사는 편이 자식에게도 좋지 않겠느냐고 물었다.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이 부친 나름대로 ‘자립’하는 방식이었던 것이다. 누군가에게 기대지 않기 위해 다른 누군가에게 기대는 것. ‘살림 능력과 자기 돌봄 능력을 키울 생각은 안 하나?’라는 물음이 머릿속을 스쳤지만… 어쨌든 그에게 고마워해야 할 것이다. 아주 튼튼하진 않지만 어느 정도 나를 지탱하는 경제적 기둥이 존재한다고 감각하는데, 거기에 부친의 지분이 있음 또한 알고 있다.
고마운데… 고마우면서도 밉다. 그가 자식에게 할 도리를 다했다고 당당할 때마다 보호자에게 돌봄 받지 못해 꼬질꼬질했던, 부모와 함께 하라고 들려 보낸 숙제를 혼자 힘으로 조악하게 해간 뒤 선생에게 핀잔 당해 울며 교실 밖을 뛰쳐나갔던 유년기의 내가 떠오른다. 진로에 대해 터놓고 고민할 어른 없이 제한된 정보로 아쉬운 결정을 해야 했던 수능 직후의 나와, 과정에 대한 관심 없이 결과에 대해서만 평가했던 부친, 해외 체류 뒤 몸무게가 늘었다고 다른 사람 앞에서 나를 농담거리로 삼았던 그의 모습 등 기억의 파편이 떠오르면 미움도 함께 치솟는다.
분명 최악의 양육자는 아니었다. 내게 소리 지르거나 언어폭력을 퍼부은 적은 있지만, ‘줘팬’ 적은 없다. 그런데도 여태껏 응어리를 품은 내가 너무 속 좁다는 생각도 든다. 부친에게 기대를 품었고, 그것이 거듭 좌절됐기에 이러한 상태라고 진단한다. 아직도 나는 부친이 내 감정을 이해하고 공감하며 진정 미안함을 표현하길 바라는 기대를 버리지 못했다.
공백으로만 남은 모친에게는 기대도 미움도 없는데, 제 나름대로 책임지려 한 부친에게는 기대하고 실망하고 미움마저 느끼다니…. 부친 입장에서는 억울할 수 있다. 그래서 더 당당함을 표출하는지도 모르겠다. 부친은 자신 덕에 내가 독립심 있게 자라지 않았냐고, 자신에게 감사하라고 의기양양하게 말한다. 그것에 질려 연락을 먼저 안 하게 된다. 그의 말마따나 ‘독립적으로’ 자라서 연락도 잘 안 하고 혼자 알아서 잘 살고 있다고 이해해주길 바라면서.
이런 나는 불효자가 분명하다. 무슨 경험을 더 하고 얼마나 더 성숙해지면 불효를 그만둘까? 나이 들어 작고 약해진 그를 떠올리면 짠한 마음이 들다가도 “다른 집 자식들”과 비교하며 살가운 돌봄을 기대하는 눈치를 내비치면 차가워진다. 그 자식들은 부모로부터 정서적 지지를 받으며 자랐기에 마음과 돌봄을 돌려줄 수 있는 것 아닐까, 하는 발상에서다.
부친의 말대로, 나는 한국 보편보다 일찍이 독립적일 수 있었다. 청소년기부터 스스로의 일을 직접 선택하고 그 선택을 책임지는 일을 반복하며 살았다. 이것은 자립을 구성하는 개념에서 중요한 자율성(autonomy)과 닿아 있기에, 스스로 자립 능력을 갖추고 있다고 생각하며 자랑스러워했다. 부모가 만든 감옥의 안락함을 누리는 이들이 부러울 때도 있었지만, 그게 결국 숨 막히게 하는 사례를 보며 내 상황이 ‘오히려 좋다’고 생각하게 됐다.
그러나 정서적으로는 자립하지 못한 상태였음을 이제는 안다. 보호자로부터 관심과 정서적 지지를 받지 못한 성장 과정은 큰 구멍을 남겼고, 건강하지 못한 방식으로 타인에게 의존하게 만들었다. 세상에 진정한 내 편은 없다는 감각과 지지자를 만들고 싶다는 욕망으로 연애에 몰두했다. 그때는 그게 삶에서 너무 중요한 부분이었다. 약 10년간 그랬다. 요새 ‘남자에 미친 새끼’의 줄임말인 ‘남미새’라는 말이 유행이라고 하던데 돌이켜 보면 남미새 10년이었다. 그 결과로 남은 것은 ‘제발 빨리 죽어주었으면 좋겠는’ 남자들의 이름이 적힌 리스트다.
연애로 인한 에너지 낭비와 감정 소모가 지긋지긋해진 뒤에야 비로소 그 시간과 에너지를 규칙적인 운동과 취미 생활에 쓰는 게 낫겠다고 판단했다. 그리하여 ‘취미 부자’의 일대기가 펼쳐지는데… (이하 생략) 피아노, 랩 스킬, 탭댄스, 연기 수업 등등을 전전하다 정착한 게 탱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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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둥은 다다익선
탱고는 내 신체를 더 건강하게 만들며 정서적인 충족감을 줬다. 탱고를 추기 시작한 뒤 애인이 있을 때도 느꼈던 외롭다는 감정을 좀처럼 느끼지 못하게 됐다. 사람이 좀 지겨울 정도다. 매일 아침 일어나면 단체 채팅방에 수십, 수백 개의 메시지가 쌓여 있고, 아주 사소한 구실에도 ‘벙개’나 뒤풀이가 열린다. 생일이나 명절 같은 ‘특별한 날’에도 외롭지 않다. 열려 있는 밀롱가는 여럿이고 내키는 곳을 선택하여 방문하면 되므로.
한편으로 의심한다. 이래도 괜찮은 걸까? 가슴의 구멍이 너무 사라져도 문제 아닐까? 아니, 사람이 좀 결핍이 있어야 글도 쓰고 파이팅 넘치게 살지…. 또한 원가족과 떨어져 너무 만족스럽게 지내다 보니 부친 생각이 잘 안 난다. 이러면 불효 탈출은 더 요원하지 않을까?
오랜만에 만난 친구와 근황 토크를 하다 친구가 놀랐다. “지금 일상을 채우는 것들 다 탱고랑 관련 있네? 신기하지 않아? 탱고를 시작하지 않았다면 지금 완전 다른 일상을 살았을 거 아냐.” 그 말을 듣고 경각심이 들었다.
자립은 어디에도 의존하지 않는 상태가 아니라, 기댈 수 있는 곳을 여러 군데로 늘려 각각의 의존도를 낮추는 것이라는 해석을 최근 접했다. 자신을 지탱하는 기둥 하나에 의존 말고 여러 개의 기둥을 만들라는 뜻일 테다. 일, 취미, 인간관계 등 각각의 기둥의 균형을 유지하는 것. 이런 관점에서 볼 때 현재 내게 탱고라는 기둥이 너무 커진 것 아닐까? 탱고를 좀 줄이기로 했다.(그리고 살사를 시작했다…)
진정 자립한 사람은 다른 사람을 돌볼 여유도 갖게 된다는 견해와도 마주했다. 부모의 영향으로부터 벗어나는 게 자립이라고 생각했는데, 어쩌면 영향을 주고받으며 때때로 부모의 기둥이 되어주는 것이 이상적인 자립 상태인 걸까 고민하게 됐다. 뭐, 꼭 이상적일 필요는 없겠지만.
자립에 대한 혼란 틈에도 여전히 굳건한 믿음이 있다. 몇 개의 기둥이 결여된 채 태어났을지라도 괜찮아질 수 있다는 것. 개인의 의지와 커뮤니티의 도움이 있다면, 새로운 기둥은 어렵지 않게 세워질 수 있다는 것. 그리고 만약 당신이 새로 세울 기둥을 찾고 있다면, 마음 구멍의 크기가 작지 않다면 권할 것은 탱고이다. 츄라이 츄라이.
소개
최서윤
재미있고 의미도 있는 작품을 만들고 싶다. 게임 <수저게임>, 영화 <망치>를 만들었다. 저서로 <불만의 품격>, <미운청년새끼>(공저) 등이 있다. 인스타그램 @monthlying
글. 최서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