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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316 에세이

신년에 본 영화, 영화에서 본 것들

2024.02.08

ⓒ 영화 <플랜 75> 스틸 (제공: 찬란)

1월이다. 프리랜서 생활이 비수기로 접어들었으니 많은 시간을 영화 보기에 쏟을 생각이다. 연말과 연초에는 몇 편의 개봉작들과 얼마간의 개봉 예정작들을 부지런히 챙겨 봤고 고전 영화도 일부러 찾아보고 있다. 시사회에 가는 것은 좀 다른 경우이고 그렇지 않고 혼자 극장을 찾을 때면 마음이 평화롭다. 누구를 신경 쓸 일 없이 오직 영화 앞에 가만히 앉기만 하면 새로운 세계가 펼쳐진다. 그때만큼은 잠시나마 세상과 단절될 수 있다. ‘나 극장이야. 영화 보고 있었어.’ 소재 파악이 되지 않았다고 해서 큰 무리가 없는 정당하고 그럴듯한 알리바이, 극장과 영화. 그런 면에서는 수영장도 마찬가지다. 물에 들어가 있을 때 느끼는 자유롭고 편안한 느낌의 연유를 되짚어보면 그중 하나에는 단절이 있다. 바깥세상과 연락을 끊은 채 부력에 집중하고 저항하고 의탁하는 시간은 온전히 나의 것이다. ‘나 수영장이야. 수영하고 있었어.’ 그럴듯하고 아름다운 알리바이, 수영장과 수영. 어느새 내 인생 한가운데로 들어와 있는 영화와 수영이 얼추 비슷하고 닮아 보인다. 영화를 보고, 수영을 하는 일의 양태와 그런 것에 취미나 관심을 기울이는 기질과 성정에서 그렇다는 말이다. 여럿 속에서 혼자가 될 수 있는 적절하고 자연스러운 방법, 그럴듯하고 안온한 거리의 움직임. 그런 면에서 영화와 수영은 꽤 닮았구나 싶다. 비추고 비치며 반사한다는 영화(映畫)의 ‘영’ 자와 헤엄치고 무자맥질하는 수영(水泳)의 ‘영’ 자가 영 비슷할 리 없지만 물이란 자고로 ‘영’(映)의 매개니 완전히 엉뚱한 다리를 짚은 건 아닌 것 같다. 영화와 수영으로 점철된 나날들이 주는 평안이 있다.

강아지와 고양이가 영화에 깃들면
가만, 요즘 어떤 영화를 봤던가. 일기장을 들춰 보는데 이상한 메모가 있다. <괴물>(2023)의 아이들, 길고양이 화장하다, 아키 카우리스마키의 <사랑은 낙엽을 타고>(2023)의 안사(알마 포이스티) 곁으로 온 유기견 채플린, 켄 로치의

<나의 올드 오크>(2024)의 TJ(데이브 터너)가 생의 마지막을 결심했을 때 기적처럼 나타난 유기견 마라, 쥐스틴 트리에의 <추락의 해부>(2024)의 용의자로 지목된 산드라(산드라 휠러)가 집으로 돌아왔을 때 온기를 나눠주는 강아지 스눕. 이 지면에서 이들 영화 한 편 한 편을 두고 구체적으로 이야기하기는 어렵겠지만, 어쩐 일인지 대중과 평단의 주요한 관심을 받는 영화들 모두에서 주인공들 곁 동물들을 보게 된다는 건 흥미로운 지점임은 말하고 싶다. 영화에 이토록 빈번하게 유기 동물과 반려동물들이 등장한 때는 언제부터였을까. 인간과 동물이 함께 살고 교감하는 일이 영화의 중심 서사가 되거나 영화에 온기를 불어넣는 일은 이제 너무도 자연스럽고 익숙하며 그래서 또 각별하다. 어쩌면 인간이 인간보다 동물을 더 신뢰하고 친밀하게 느끼고 있는 게 아니겠느냐는 생각마저 든다. 국내 상황만 봐도 전혀 말이 안 되는 것 같지는 않다. 2024년 합계출산율은 0.68명을 기록할 전망이라 하는데, 그에 반해 2023년 한국 반려동물보고서에 따르면 2022년 말 기준 국내 반려동물 양육 가구는 전체 가구의 25.7%를 차지하고 있다. 동물과 함께하는 삶의 형태가 더 많아지면 많아졌지 줄지는 않을 것 같다. 그러고 보니 앞서 언급한 영화에서도 주인공들은 다른 가족 구성원 없이 혼자 살거나 단독자로서 자신의 위치가 위협받거나 혼자가 되지 않기 위해 친구를 찾아 나선다는 공통점이 있다. 그들 앞에 홀연히 등장한 귀엽고 사랑스럽고 따뜻한 생명체들을 외면하기란 불가능했으리라.

ⓒ 영화 <나의 올드 오크> 스틸

카메라는 포기할 수 없어
또 다른 메모가 눈에 들어온다. 이번에는 정직하거나 의뭉스러운 기록 기계, 카메라다. 영국 북동부 폐광촌을 배경으로 하는 <나의 올드 오크>의 카메라들. 한때 빛나던 시절을 보낸 광부들은 이제 흑백사진들 속에서만 존재하고 그 세월을 기록한 오래된 카메라만 남았다. 사진작가가 꿈인 난민 소녀 야라(에블라 마리)의 손에 쥐어져 있는 카메라는 소녀의 유일한 미래처럼 보인다. 지난 시간에서 미래로 이어지는 켄 로치의 카메라는 선한 의지의 발현과 가까스로 부여잡은 미래를 향한 선언적 도구로 보인다. 이란 정부의 탄압으로 영화 제작의 자유와 이동의 제약을 받는 자파르 파나히의 신작 <노 베어스>(2024)의 카메라들은 훨씬 더 복잡한 윤리적, 정치적, 영화적 문제를 제기해온다. 영화가 순순히 진행되는가 싶었으나 곧이어 이것은 이란과 튀르키예 접경지대에 있던 파나히가 원격으로 촬영 중인 영화 속 장면임을 알게 된다. 이때 카메라는 픽션과 논픽션, 영화와 영화 밖 현실 사이에 보이지 않는 경계를 흐트러뜨리기도 하고 선연하게 긋기도 한다. 파나히가 마을 주민에게 쥐여준 카메라나 파나히가 마을 주민들을 찍는 카메라는 전통과 관습이라는 이름으로 과격한 아집에 빠진 이란 사회를 여실히 보여주는 기록자이자 비극의 파문을 일으키는 무시무시한 돌멩이가 된다. 한편 <추락의 해부학>(2023)의 카메라는 앞선 영화들처럼 직접적으로 제 모습을 드러내지는 않지만, 이 영화 자체가 카메라의 눈을 자처한다고 해야겠다. 산드라의 남편이 추락사하게 된 이유, 범인을 추적하고 그 증거를 수집하고 검증하는 과정과 지난한 말의 쟁투가 일어나는 법정 장면까지. 영화의 카메라는 마치 사건 담당 조사원이자 배심원인 양 눈을 크게 뜨고 이리저리 부지런히 굴려가며 상황과 인물, 말과 말의 행간을 쫓으며 확인하기 분주하다. 이때 카메라의 눈은 곧 관객인 우리의 눈이 된다. 이처럼 거장들의 영화, 크나큰 찬사를 받은 영화가 카메라 혹은 카메라의 눈을 적극적으로 소환해올 때, 그들이 보고 있는 것에 실리는 무게감은 좀 더 각별하고 남달라 보인다.

강퍅한 세상일지라도
마지막 메모, 지금의 세태와 세상을 영화로 옮긴 경우가 꽤 있다는 것이다. 하야카와 치에의 <플랜 75>(2024)는 일본 정부가 75세 이상인 국민 중 일종의 존엄사를 택한 이들을 지원하는 제도를 상상한다. 이 제도에 지원한 인물, 이 시스템을 지원하는 이들, 이 구조로 생계를 잇는 사람들이 거미줄처럼 이어져 있다. 고령 사회에서 어떻게 늙어 생의 마지막을 맞을 것인가 하는 질문이 결코 남 일 같지 않다. 엠마뉘엘 카레르의 <두 세계 사이에서>(2024)는 저명한 작가 마리안(줄리엣 비노쉬)이 최저 생계비를 받으며 살아가는 청소 노동자들에 관한 글을 쓰기 위해 정체를 숨기고 위장 취업해 일하며 글 쓰는 과정을 담았다. 육체노동의 구체적인 작업 과정, 청소 노동 현장의 상황과 분위기가 비교적 꼼꼼하게 구현된 것은 원작인 르포르타주 소설 <위스트르앙 부두>(플로랑스 오브나 지음, 현실문화연구 펴냄)가 든든히 받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소개

정지혜
영화평론가. 영화에 관해 말하고 쓰며 영화 글쓰기 워크숍을 진행한다. 영화와 글쓰기, 그 사이에서 또 다른 길을 모색하고 도모하고 싶다.


글. 정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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