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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325 에세이

옆에서 - 체념을 품고서 살아갈 수 있을까?

2024.07.25

글. 유지영

속으로 생각하는 것과 생각을 입 밖으로 내서 말하는 것은 이렇게나 다르구나. 최근 인터뷰를 ‘당할’ 일이 두 차례 있었다. 기자는 인터뷰를 하는 일은 많지만, 인터뷰를 당하는 일은 그에 비해 드물다. 그러나 이번 인터뷰는 기자라는 직업에 대한 것이 아니라 나의 다른 정체성(혹은 역할) 때문에 생긴 내게는 일종의 ‘사건’이었다. 그중 하나는 진도 믹스견을 반려하고 있는 보호자로서, 다른 하나는 기후위기를 비롯한 이유 때문에 아이를 낳지 않겠다고 결정한 여성으로서 인터뷰 대상이 됐다.

각각 두 시간 이상 인터뷰에 응했고, 그간 생각했던 바를 말했을 뿐인데 끝나고 나니 기진맥진해져 집으로 오는 차 안에서 턱을 하늘로 치켜들고 잠들 정도로 피곤해지고 말았다. 그렇게 오랜 시간 내가 하는 말을 실시간으로 내가 듣는 일은 흔치 않았다. 어렴풋했던 생각이 구체적인 언어를 싣고 내 목소리를 통해 발화되는 순간 나 또한 모른 척 넘기고 싶었을 것이 분명한 내 생각을 직면하게 됐다. 게다가 인터뷰를 통해 말했기 때문에 따로 정정하지 않는 이상 내 말은 글을 통해 쓰이고 고정될 것이었다.

공교롭게도 인터뷰를 마치고 온 날 밤, 열이 나기 시작했다. 온몸이 뜨끈해져서 체온을 쟀고 37.5도여서 타이레놀을 두 알 먹고 잠들었다. 내가 내게도 숨기고 모른 척 넘기고 싶었던 생각은 내 안에 깊숙이 박힌 세상을 향한, 미래를 향한, 내 삶을 향한 깊은 체념과 절망이었다. 나는 이번에 응했던 한 연구자의 박사논문을 위한 인터뷰에서 “저는 아이를 낳고 싶었고, 미래에 대한 긍정적인 전망이 있다면 분명 아이를 낳았을 거라고 생각해요.”라고 말했다. 기후위기나 날로 커지는 빈부격차나, 예나 지금이나 잔혹한 양상의 전쟁범죄를 보고서 나는 세상이 좀처럼 나아지지 않는다는 생각을 하곤 한다. 그리고 이런 세상에서 아이를 살아가게 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을 남편과 공유하고 있다.

두 인터뷰는 각각 다른 사람이 진행했지만 공통적으로 내가 한 말이 혹시 기자라는 직업 때문에 얻게 된 판단이 아닌지를 물었다. 정말 그럴까? 내가 아무래도 뉴스를 너무 많이 본 탓일까? 실제로 뉴스는 세상이 망한다고 떠들고, 숨이 넘어가기 직전에 한두 개씩 그래도 좋은 소식이라면서 가져다준다. 실제로 나조차 기자 일을 하면서 기사를 통해 좋은 소식을 전한 기억은 많지 않다.

다음 문장을 쓰는

그러나 이런 체념과 절망을 공유하는 이가 적어도 나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최근에는 일본의 1995년생 작가 다카시마 린이라는 연구자가 쓴 책 〈이불 속에서 봉기하라〉(생각정원 펴냄, 2023)를 읽었는데, 다카시마 린은 여기서 “우리 세대는 처음부터 대체로 모든 것을 체념하고 있다. 아니, 어쩔 수 없이 체념하게 되었다고 본다. 자기 자신이 주체로서 무언가를 선택했다는 감각은 거의 없다. 그저 정신을 차려 보니 나빠져 있었고, 그 ‘나쁜 흐름’을 거스를 수 없다는 것만큼은 확실하게 학습했다.”라고 말한다. 그러니까 난폭하게 줄이자면 이생망(‘이번 생은 망했다’를 줄여 쓴 단어)이었다.

그럼에도 그는 살아서, 살아남아서 눅눅한 이불 속일지라도 몸부림치는 것 또한 혁명이라고 주장한다. 그는 그렇게 몸부림치는 이들과 연대하고 싶다고 말한다. 어떻게든 살아 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혁명이 시작될 수 있다는, 아니 그냥 그 자체로 혁명이라는 뜻이었다. 이런 낙관이라니? 아니, 이런 절망이라니? 나는 인용한 이 대목을 소리 내서 다시 읽다가 여러 감정이 교차한 끝에 그만 울고 말았다.

나는 기자 일이란 세상이 나아진다는 걸 굳게 믿지 않으면 지속하기 쉽지 않다고 생각한다. 기자는 자기 자신이 가치 있다고 판단한 사실을 발굴해 세상에 알리는 일을 한다. 그러나 이러한 역할의 기저에는 독자들에게 사실을 알려주면, 이를 읽고서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제대로 판단하고 그것이 사회에 도움이 된다는 소명이 전제가 된다. 그러나 오늘날 이러한 가치는 참담할 정도로 제대로 작동되지 못하고 있다. 무엇이 옳고 그른가. 그리고 과연 그 옳고 그름을 기자는 잘 알고 있을까.

그러나 다카시마 린의 말처럼 “살아있으니” 깊은 체념을 품고서라도 해야 할 일을 할 수밖에 없다는 것 또한 알고 있다. 인터뷰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와 이불 속에서 웅크린 채로 이 모든것의 의미를 끝없이 곱씹어보았다. 내가 체념했다는 걸, 그것도 진심으로 체념했다는 걸 알았고, 그럼에도 죽기보다는 살아가기를 선택하면서 여기서 조금이라도 나아가야 한다고. 그러니까 ‘이생망’의 다음 문장을 쓰고 싶다고.


유지영

〈오마이뉴스〉 기자. 팟캐스트 〈말하는 몸〉을 함께 만들고 동명의 책을 썼다. 사람 하나, 개 하나랑 서울에서 살고 있다.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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