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에 창립 50주년을 맞는 문학과지성사(문지), 그중에서도 한국문학팀에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은 특히나 여운이 오래갈 사건인 듯 보였다. 문지에서 작가의 유일한 시집 〈서랍에 저녁을 넣어두었다〉와 첫 소설집 〈여수의 사랑〉을 비롯한 다섯 권의 소설이 출판되었기 때문이다. 축하 인사를 한가득 받았다는 팀원들의 일상은 글을 편집하고 작가와 소통하면서 작품을 출판하는 것으로 흘러간다.
출판사의 발자취는 독자들이 함께 디뎌 만든다. 편집자들의 말마따나 문학과지성사 시인선이 2,000원일 때부터 시집을 구매했던, 작가가 그려가는 궤적을 묵묵히 바라봐준 이들. 이제 막 총천연색 한국문학에 사뿐히 발을 들인 이들까지, 중고등학생부터 나이 지긋한 독자들은 살아온 시간은 다르지만 모두 같은 애정과 호기심으로 문지의 작품을 읽는다.
문학과지성사 1층에는 길을 가다 누구나 시선을 빼앗길 만한 큰 창이 있다. 문지의 역사와 현재가 전시된 ‘문지포스트’다. 작가와 편집자들은 이 창을 마음에 품고 아직 오지 않은 독자와 가장 가까운 곳에서 만날 준비를 한다. 한국문학팀 이주이, 허단, 윤소진, 유하은 편집자들과 그 창문을 닦는 일에 대해 이야기했다.
글. 황소연 | 사진. 김화경
편집자들의 일상을 공유하는 인스타그램 계정(moonji_hanguk)이 재미있다. 계정 운영은 어떤 아이디어에서 출발했나.
주이 편집자는 책만 만든다는 틀을 깨고 싶었다. 타 출판사들도 유튜브나 SNS 채널을 운영하지 않나. 독자들과 직접 소통할 소소한 장이 마련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한국문학팀 인스타그램 계정을 만들고 구간 도서에서 자주 틀리는 용어를 찾아 함께 살펴보거나 편집자의 책상, 독서 노트와 같이 팀원들 각각 하나씩 주제를 맡아 책을 자연스럽게 홍보할 수 있도록 꾸렸다.
하은 독자분들이 편집부의 일상 이야기도 좋아해주셔서 근래에는 조금 더 느슨하게 운영하고 있다. 담당한 책이 출간되면 자랑도 하고 소위 ‘인터넷 많이 하는 사람’인지라 가볍게 이런저런 짤도 공유한다.(웃음) 얼마 전에는 퇴근할 때 한강 작가의 시집을 서랍에 넣고 사진을 찍어 올리며 ‘벌써 여섯 시가 넘었으니 서랍에 저녁 넣어 두어야겠다.’라는 식으로 개그 아닌 개그도 했다.
계정을 통해 한국문학 작가들의 ‘얼굴’을 들여다보는 경험이 신기했다. 작가라고 하면 홀로 고요한 공간에서 글을 쓰는 모습이 떠오르는데, 독자들과 만나는 모습을 포착하는 것이 재밌었다.
소진 신간을 출간한 작가는 문지 사옥에 방문해 동료 문인에게 발송할 책에 서명을 하는 관례가 있다. 보통 이때 출간된 책을 가장 먼저 만나게 된다. 아직 서점에 진열되지도, 독자를 만나지도 않은 자신의 책을 처음으로 대면하는 순간이다. 이런 특별한 순간들을 조금씩 소개하다 보니 자연스러운 노출로 이어졌던 것 같다.
단 과거에는 작가들이 외부로 개인을 노출할 수 있는 SNS 채널 운영이 활발하지 않았다. 지금은 작가들이 다가가기 어렵고 베일에 싸인 존재가 아니라 각종 문화 콘텐츠를 적극적으로 공유하는 동시대인이라는 생각을 많이 한다. 젊은 작가들 같은 경우에는 자기 홍보에 열성적인 편이라 우리보다 SNS 활용을 더 잘한다.
작가와 독자들의 만남엔 어떤 시너지가 있나.
단 어떤 획기적인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건 아니다. 작품을 낭독하는 작가의 육성을 듣고, 독자들이 편하게 질문을 하는 시간과 공간을 마련하는 일을 한다. 작품으로 작가의 캐릭터나 삶이 모두 드러나지 않기 때문에 그 시간을 통해 작가에 대한 이해가 풍부해진다. 특히 작가의 전작을 출판하는 경우에 그런 시너지가 커진다. 오직 문지에서만 엿볼 수 있는 족적이랄까. 문지 캐치프레이즈에 ‘전통’과 ‘전위’라는 단어가 있다. 두 단어가 배치되는 듯하지만 상통하고, 한국문학팀의 작업도 그 흐름을 따라간다.
주이 문학을 좋아하는 독자분 중에 문학과지성사를 모르는 분은 없으리라 생각한다. 이를 증명하듯 독자와 만날 수 있는 자리에 꼭 출판사의 팬인 분들도 오신다. 또한 작품과 작품 바깥에 대한 심도 있는 질문을 던지는 분들도 많아서 만나고 나면 작가님도 편집자도 에너지를 얻곤 한다.
오랜 역사를 가진 출판사에서 일한다는 건 어떤 경험인가.
소진 학창 시절 문학 교과서에서나 접했을 법한 원로 선생님들을 만날 기회가 많다. 고등학교 때 최두석 시인의 시 〈성에꽃〉을 좋아했는데 작년에 선생님의 시집 작업을 맡게 되었다. 절벽에 피는 동강할미꽃이 사진을 찍으려는 사람들에게 짓밟힌 걸 보고 가슴 아파하는 모습이나 한겨울 강 위에 서 있다가 다리가 꽁꽁 얼어버린 두루미를 염려하는 마음이 시집 〈두루미의 잠〉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자연과 인간을 노래하는 시인의 담박한 시선이 변치 않고 이어지는 걸 가까이서 지켜볼 수 있어서 기뻤다.
하은 가장 최근 담당한 책 두 권을 돌이켜보면 하나는 2018년에 작고하신 김윤식 선생님의 〈한국근대문예비평사연구〉 개정판, 또 하나는 재작년부터 작품 활동을 시작한 유선혜 시인의 첫 시집 〈사랑과 멸종을 바꿔 읽어보십시오〉이다. 기라성 같은 원로부터 동시대의 신인까지 아울러 함께 작업할 수 있다는 점이 특별하게 느껴진다.
책을 요약 형태나 뉴스레터, 모임 등 여러 형태로 즐기는 사람들이 생겼다. 독서 인구의 관심사나 독서를 즐기는 방법에 변화가 있다고 느낀다면?
단 신조어는 잘 모르지만 관심이 많은데, 질문을 듣고 두 가지 단어가 떠올랐다. 예전에는 세대 간 거리감을 ‘세대 차이’라는 말로 표현했는데, ‘MZ’라는 단어가 생긴 후 ‘차이’라는 단어는 증발했다. ‘느좋(느낌 좋은)’이라는 유행어도 그렇다. 세대를 아우르는 말맛이나 미감은 희미한 단어다. 요즘의 독자는 책 역시 자신의 개성을 구현하는 텍스트로서 쓸모가 있는지, 모호하지만 강력한 매력이나 느낌을 지닌 콘텐츠인지 매우 빠르게 판단하고 향유한다는 생각이 든다.
주이 매체나 SNS가 발달하면서 책을 통해 지식을 얻고 마음의 양식을 쌓는 시대는 지나가고 있다고 생각한다. 책을 오랜 시간 공들여서 읽기 어려운 시대고 트렌드가 빠르게 변화한다. 보기에 예쁘고 갖고 싶은 책의 수요가 늘어나기도 했다. 문학 편집자로서 고민되는 지점이 많지만 여전히 느리더라도 차근차근 읽어주시는 독자분들이 많고 그런 분들이 계속 유입되고 있다고 믿는다.
한국문학의 매력은 뭘까?
단 일단 모국어다.(웃음) 번역 문학이 독자에게 주는 것과는 좀 다른 감상이 있다. 또 작가들의 시도 덕분에 SF 문학 시장이 상당히 커졌다. 장르문학이 순문학 안에 많이 유입된 것도 큰 변화다. 눈여겨보는 독자라면 한국문학 안에 가짓수와 층위가 다양해졌다는 걸 알 수 있을 것이다. 이미 이걸 잘 아는 독자들이 마니악한 취향을 지니고 주도면밀하게 작품을 살펴본다는 점이 피부로 와닿는다.
주이 노벨문학상 수상자에 한국 작가가 이름을 올렸다는 것만으로도 한국문학이 얼마나 매력적인지 증명됐다고 생각한다. 이를 통해 독서의 저변을 넓히며 문학의 순수한 재미를 찾아보셨으면 좋겠다.
소진 올해 초, 문지 시인선이 통권 600호를 출간했다는 소식이 일본에서 기사화된 적이 있다. 어릴 때는 일본 작가들의 소설을 많이 읽었던 것 같은데, 일본에서도 시집 시리즈가 600권이나 있다는 것은 상당히 이례적이라고 하더라. 이렇게 시인이 많고 시를 읽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 자체가 한국어의 표현의 다양성과 가능성을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 이후 일상에 생긴 변화도 궁금하다.
단 종종 외부에서 책과 관련된 질문이 들어오면 이해를 돕기 위해 설명이 길어지곤 했다. 한국문학은 비주류라는 인식도 확실히 깔려 있었고. 이제는 역으로 ‘당신이 잘 모르는 거지.’라고 생각할 수 있으려나.(웃음) 다 같이 기뻐할 소식이 생긴 게 얼마 만인지 모르겠다. 좋았다. 문학이어서 더 좋았지만, 아마도 모두가 침체되고 힘든 시기에 ‘한국’에 경사가 났다는 기쁨을 크게 느끼지 않았을까.
소진 한강 노벨문학상 수상 당일 동생에게 “우리 집에 한강 책 있어?”라고 전화가 왔다.(웃음) 당연히 본가에는 한강의 여러 작품이 초판으로 있었는데 그동안 가족들이 내 책장에 관심을 가진 적이 없어서 그런지 그 사실이 재미있었다. 또 직장 다니면서 축하받을 일이 없지 않나. 친구들이 축하한다고 하니 너무 좋았다.
하은 소식을 들었을 때 마치 내가 수상한 것처럼 정말 기뻤고, SNS를 통해 독자분들이 건네주신 축하도 기억에 남는다. 더구나 한강 작가의 작품들은 폭력과 고통을 똑바로 마주하고 있지 않나. 앞으로 내가 살아갈 미래가 아주 어둡지만은 않겠다는 생각이 들어 위로받은 기분이었다.
주이 주변에서 연락을 많이 받았다. 특히 작년에 소설집 작업을 함께 했던 김이설 작가도 아침에 울면서 연락을 주셨다. 문학과지성사에서 출간된 한강 작가의 작품 중 초판본을 가지고 계신 게 있다며 인증 숏도 보내주셨다. 노벨문학상 관련 업무도 기쁘게 진행하고 있다.
노벨문학상 발표 이후 ‘과시용 독서’라는 조어가 유행(?)이 됐다. 이런 단어의 등장은 어떻게 느끼나.
단 그냥 요즘의 세태를 반영하는 표현이라고만 본다. 과시는 내 멋짐을 드러낸다는 건데, 나를 돋보이게 하는 아이템에 책이 들어가는 건 좋지 않나. 그 욕망은 괜찮은 출발일 수 있다.
주이 출발은 과시용이었을지라도 차츰 독서에 매력을 느껴서 앞으로 확장해서 읽어나가면 되니 결과적으로 좋은 유행어인 것 같다.
하은 사실 나부터가 과시용 독서를 한다.(웃음) 독서를 통해 과시하는 것이 소유물이나 능력이 아닌 ‘태도’인 만큼, 각자가 어떤 가치를 지향하고 있는지 드러내는 흐름으로 느껴져 반갑다.
소진 출퇴근길에 책을 읽곤 하는데 종종 힐끔힐끔 보는 분들도 있었다. 그런데 최근에는 지하철에 앉아 책을 읽는데 양옆에 앉은 분이 독서를 하고 있어서 반갑고 신기했다. 그런 풍경이 많아졌으면 좋겠다.
편집자들이 문지의 책을 한 권씩 추천한다면.
소진 김형중 평론가의 비평집 〈시절과 형식〉을 추천한다. 광주에서 나고 자란 작가는 등단 이후 해마다 광주에 대해 말하겠다는 사명을 지켜오고 있다. 최근 인간의 존엄성에 대해 생각하게 되는 사건들이 많았는데 이 책에 담긴 임철우나 김숨 작가의 문학이 남기는 의미들을 좇다 보면 문학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된다. 무엇보다 김형중 평론가는 뺏고 싶을 정도로 글을 잘 쓰는 작가로 쉽고 명확하게, 또 재미있게 쓰인 이번 비평집 역시 지루함 없이 빠져들어서 읽을 수 있을 것이다.
하은 ‘한국문학전집’에 속해 있는 강경애의 〈지하촌〉을 추천한다. 격동과 곡절을 겪으면서도 끈질기게 삶을 일구어나가는 작중 여성들의 에너지가 상당해서, 작품들을 읽고 나면 마치 그들과 직접 이야기를 나눈 듯 힘을 얻는다.
주이 이서아 작가의 〈어린 심장 훈련〉을 추천한다. 2030이라면 좋아할 수밖에 없는 트렌디함과 빠른 전개, 현실과 환상 문학 사이에 놓인 매력적인 작품이다. 일곱 개의 단편 속 화자가 점점 성장해나가는 재미난 구성을 가진 책이다. 이 밖에도 문학과지성사의 좋은 소설선이 넘쳐 나니 시인선뿐 아니라 소설선에도 많은 관심 부탁드린다.(웃음)
단 문지 대표이자 문학평론가인 이광호 선생님의 〈작별의 리듬〉을 추천한다. 장르문학에서 개념미술까지, 예술의 다양한 분야를 아우르는 스펙트럼이 있다. 문학과지성사가 함께하는 한 국문학의 방향성, 과거와 현재, 미래를 읽을 수 있는 텍스트다.
문학에 빠지고 싶은 이들에게 책을 읽는 이유를 전한다면.
단 독자들은 매일같이 책이 수백 수천 권 쏟아져 나온다고 느낄 수 있는데, 작가에겐 일생일대의 역작이다. 나이 지긋한 작가들도 수십 권 책을 내면 무뎌지지 않을까 싶지만, 대부분 그 설렘과 긴장을 유지하며 고도의 집중력을 발휘한다. 가성비와 효율을 중요하게 여기는 시대다. 타인을 만날 시간은 부족하고 세계는 넓게 보고 싶다면 책 한 권은 엄선된 사유가 담긴 효율적인 콘텐츠다.
주이 문학은 영원히 늙지 않는 청춘 같다. 작가의 연령과 상관없이, 열정과 패기를 가지고 계속 새로운 세계로 확장해나가는 문장들이 주는 영감과 공감대, 새로움이 내가 문학을 계속 찾는 이유다.
하은 책을 읽지 않을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흥미로운 제목이 눈에 띄어서,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과 소통하고 싶어서, 나 자신 속에 침잠하기 위해서 등등. 책을 읽는 이유는 여러 가지 형태로 늘 우리 곁에 있다.
소진 책을 좋아해서 읽는다기보단 더 좋아하고 싶은 마음에 읽는다. 바쁜 일상에서 시간을 내서 책을 읽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책을 읽음으로써 내가 사는 세상과 타인을 더 깊이 이해하다 보면 나를, 타인을, 세상을 더 좋아하게 되는 힘을 얻게 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