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생명의 경계에서 ― 비질 참여 현장 (1)'에서 이어집니다.
거대한 구조 앞에서
돼지로 꽉 찬 트럭과 빈 트럭이 몇 차례나 도살장 안팎을 들어오고 나갔다. 경기, 충남 등 트럭 번호판의 지역 구분도 다양했다. ‘축산시설 출입차량’, ‘생축운송 특장차량’ 등의 글씨가 쓰인 트럭에 붙은 스티커도 눈에 띄었다. 돼지를 실은 트럭 사이로 ‘지정폐기물 수집 운반 차량’도 도로를 달렸다. 활동가들은 축산업체 직원들과 참여자들 사이를 오가며 계속 소통했다. “지금 차가 이쪽으로 정차한다고 해요. 조금 더 안전한 쪽으로 이동할게요.” 인도가 따로 없는 곳이기에 참여자들은 트럭의 정차 방향에 따라 조금씩 발걸음을 옮기며 비질에 참여했다. 며칠 전 진행한 사전 교육에서 활동가들이 한 말이 떠올랐다. “축산업 종사자들은 우리가 연대해야 할 시민이지, 견제하고 공격해야 할 대상이 아닙니다.” 활동가와 참여자 모두, 어느 도살장 한 곳을 공격하는 것이 비질의 목적이 아님을 분명히 한다. 축산업이 거대한 폭력 구조라는 사실을 더 널리 알리는 데 집중하는 게 비질의 목표다. 그러므로 현장 노동자들을 존중하고 예의를 지키는 것 역시 DxE가 강조하는 규칙이다. ‘맹렬한 비폭력주의’를 추구하는 DxE의 신념은 비질 활동 곳곳에 반영됐다.
비질을 진행하는 와중에 세 번째로 참여자들 앞에 정차한 트럭에 실린 돼지들은 유난히 불안해 보였다. 트럭은 철창 안쪽에서 움직이는 돼지들 때문에 흔들렸고, 돼지들이 발을 계속 굴렀다. 한 참여자가 트럭 차체에 손을 대고 돼지들을 달랬다. 활동가가 설명했다. “70명 정도가 트럭에 타면 잠을 자면서 편히 올 수 있는데, 85명 정도가 타고 오느라 많이 힘들었나 봐요.” 활동가들은 종 차별에 반대하고 비인간 동물을 존중하는 의미로 동물을 셀 때 ‘마리’ 대신 ‘명’이라는 단위를 사용한다.
비질이 진행될수록 트럭에 실린 돼지들의 상태가 눈에 더 잘 들어왔다. 몸에는 크고 작은 상처가 가득했고, 분비물이나 배설물도 여기저기 묻어 있었다. 스프레이 자국과 진흙 자국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다. 상태가 좋지 않아 보이는 돼지들을 실은 트럭에는 체인과 얇은 밧줄, 운반을 위해 올렸다 내렸다 할 수 있는 철판 등이 달려 있었다. 돼지들이 발을 구르자 이 부속품들이 흔들렸다. 주변에서는 비행기와 차량 소음이 멈추지 않아 돼지들의 스트레스가 더 높을 것으로 예상됐다.
태초의 약속을 위해
동물권에 대해 공부하면서 관련 활동을 하고 있다는 A씨(18세)는 비질에 참여하고 싶은 마음이 늘 있었다고 참여 의도를 밝혔다. “어쩐지 멍한 상태예요. 어떤 생각이나 감정이 잘 들지 않아요. 트럭 안에 있는 돼지들을 봤을 때, 심장이 쿵 떨어지는 것 같았어요. 가까이서 보니 잘린 꼬리 같은 몸의 일부분이 눈에 들어왔고요. 돼지가 저한테 와서 제 손 냄새를 맡게 해주려고 손을 내밀었는데, 숨이 되게 따뜻했어요.”
B씨(19세)는 어떤 마음으로 돼지들을 봐야 할지 아직 잘 모르겠지만, 기억에 남은 장면이 있다고 했다. ‘새벽이 생추어리’(구조된 양돈 농장 사육 동물이나 실험동물에게 평생 살아갈 삶의 터전과 돌봄을 제공하는 곳. 돼지 ‘새벽이’는 지난 2019년 7월 농장에서 공개적으로 구조됐다)에서 돼지들을 만나고 있는데, 그곳의 돼지들은 저를 볼 때나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릴 때 초점이 딱 있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오늘 만난 돼지들은 그런 게 없는 것 같아 기억에 남아요.”
비인간 동물을 목격한 후, 참여자들은 손에 손을 잡고 ‘인간 띠 잇기’ 행동에 나섰다. 이때 참여자들이 노래한 미루의 ‘태초의 약속’ 가사는 이렇다. “바다에서 날아야 할 땅 위의 생명들이, 대지에서 뛰어야 할 벽에 묻힌 이들이, 날개를 빼앗긴, 자유를 빼앗긴, 마음을 세상을 가지고 있는 사랑을 할 것, 온 힘을 다할 것”. 몇 발짝 떨어지지 않은 공터에 모인 참여자들이 동그랗게 둘러서서 애도의 묵념을 했다. 많은 대화가 오가지는 않았지만 오늘 함께 목격한 돼지들의 모습과 축산업 현장을 기억하고 앞으로도 주목하겠다고, ‘온 힘을 다할 것’을 다짐하는 자리였다. 참여자들은 이내 ‘동물 해방은 모두의 해방’, ‘구조될, 구조할 권리’, ‘존엄하게 함께 살자’는 문구를 공터 기둥에 분필로 적었다. 그 사이로 올해 세 번째 생일을 맞이한 새벽이가 활짝 웃는 그림이 그려졌다. 이날 만난 돼지들에게서 보지 못한 미소였다.
글. 황소연
사진제공. 직접행동Dx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