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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300 에세이

체제를 훔치는 방법 (2)

2023.06.04

이 글은 '체제를 훔치는 방법 (1)'에서 이어집니다.

ⓒ digital inkjet pigment print


2개 층, 10개 공간에 분산된 동시에 연결된 모든 작품을 여기서 소개하는 것은 무리인 터라 이 칼럼에서는 홍준호의 전시가 진행되는 4번 방만을 들여다보기로 하겠다. 이 공간은 그의 대표 작품이라 할 수 있는 ‘이미지를 훔치는 방법(How to Erase an Image)’으로 명명되고 요약된다. 방에 들어서면 흠칫 놀라게 되는 멸종 위기 동물의 박제들, 호주 산불과 함께 작품의 모티브가 된 책 <최종 경고: 6도의 멸종>(마크 라이너스 지음, 세종서적 펴냄, 2022), 미켈란젤로의 모세상을 활용해 인간이 스스로 신이 된 자기 신화의 종교적 도취, 이 모든 구조적 재앙이 함축적으로 디스플레이 되어 있다. 홍준호의 전시실은 새장 속 깃털 사진 작품이 있는 방구석까지 눈길을 잡아끄는데, 이는 황금 알을 낳는 거위의 배를 가르는 바람에 생산성이 떨어졌다는 역사적 종말의 은유로서 결국 직접 제작해 전시실 중앙에 놓은, 무한대를 상징하는 뫼비우스의 띠가 끊긴 형상의 테이블과 함께 주제 의식을 부각하고 있다.

1층부터 내부 벽 대부분을 도배한 은박은 의도치 않게 구김이 생겼는데, 이로 인한 난반사는 외부와 차단된 방화벽 안에서 왜곡된 미러링에 몰입하게 하는 동선으로 유도하는 효과도 있다. 이쯤에서 작가의 작품명의 ‘erase’를 ‘지우다’가 아니라 ‘훔치다’로 해석한 까닭도 궁금했지만 묻지 않았다. 타이틀에 관심이 큰 만큼 역설적으로 바로 묻지 않고 혼자 생각해보는 버릇이 있는 탓이다. 아무래도 먼저 인식하게 되는 우리말 ‘훔치다’ 때문에 ‘steal’을 생각했다가, 사실 그 말의 본질적 의미는 그 행동의 범죄성 이전에 물리적 행위 자체에 더 다층적으로 녹아 있음을 알게 하는 무의식을 건드린 것 아닌가 해석해보았다. 이는 ‘눈물을 훔치다’라는 표현으로 대변되는데, ‘제거하다’라는 의미의 ‘remove’가 ‘move’를 품고 있듯이 ‘닦아 없애다’라는 의미의 훔치다 역시 ‘원래 존재했음’을 상기하는 동시에 그 자연적 모티브를 영민하게 자신의 작업으로 가져오는 인위적 언어 장치가 아닐까 생각해본다. 이러한 생각을 가지고 두 번째로 서울에서 그를 인터뷰할 때는 좀 더 순진한 얼굴로 그간의 작업과 전시에 대해서도 물어보았다. 그사이 전달받은 ‘흉터에서 출발한 비(非)사진적 사진’이라는 제목의 포트폴리오도 큰 도움이 되었다.

이후 작가는 ‘image’가 죽은 이의 초상을 의미하는 ‘imago’에 어원을 두었고, ‘훔치다’는 능동적 인간의 행위이자 자연에 위해를 가하고 동시대에서 ‘지워버린’ 혹은 ‘죽인’, ‘이용해버린’이라는 다층적이고 다의적인 의미로 ‘erase’를 사용했다고 밝혔다. “내 작업은 죽음의 경계를 경험한 트라우마를 극복하며 진행한, 구상에서 추상으로, 기억이 존재 이야기로 전환된 것이다. 주로 종이와 잉크 등 매체적 특성을 지닌 존재로 표현하는데, 특히 종이가 구겨지고 빔 프로젝터로 이미지가 쏘아지고 그것을 다시 촬영해 아날로그가 디지털이 되는 촉각적이고 다층적 사진(analo–digi–graphy)으로 전환하는 과정을 통해 흔적과 사라짐에 대한 작업이 된 것이다.” 이는 사진(photography)의 어원인 빛(phos)으로 그리다(graphis)의 원리가 픽셀의 디테일로 재현되거나 자신의 뇌출혈 MRA 이미지를 물감놀이와 불꽃놀이 등 여러 겹의 ‘촉각적 사진’ 작업으로 승화하는 등 작가만의 시각을 그야말로 시각화하는 과정을 거쳤다. 주민등록증, 여권, 신용카드, 건강보험증 등 현대사회에서 존재(being)가 될 수 없고, 한낱 노동하고 소비하는 경제학적 자원(resource)에 불과했음을 보여주는 작업 ‘Digital Being’은 2015년 첫 개인전에서 출발해 2019년까지 진행되었으며, 현재는 보다 발전된 작업을 보여주기 위해 오브제를 수집하고 작품에 대한 연구를 지속하고 있다. 국가의 전체주의적 세뇌를 다층적 사진으로 보여준 ‘시대 초상(Portrait of Era)’를 지나, 팬데믹으로 더욱 심해진 빈부 격차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이른바 ‘돈놀이’인 카지노 자본주의(casino capitalism)의 허구성을 설치와 실크스크린으로 구현한 ‘허락 없이 배포하여 진심으로 죄송합니다’ 시리즈는 불법 대부업 광고의 글귀를 차용한, 그야말로 ‘비현실적 현실’이기도 하다. 이 밖에도 작가는 존재와 부재의 연속성, 트라우마를 넘은 감정의 객관화, 우상의 해체 등 다양한 주제를 꾸준히 선보여 어떤 이들은 한 작가의 작업 같지 않다고 하지만, 좀 더 깊이 들여다보면 모두 작가 본인이 경험한 사회 경험이나 질병 등에서 출발해 시스템의 오작동 같은 다양한 현재 사회문제에 질문을 던진다고 할 수 있다. 나는 문득 작가의 작업 메커니즘을 좀 더 강조한 제목인 ‘이미지를 훔치는 방법’을 변형해 기능을 상대적으로 강조한 제목인 ‘체제를 훔치는 방법(How to Steal the System)’으로 홍준호를 소개해보고 싶다.

자신을 굳이 개념 미술가라 소개하지는 않지만, “예를 들어 코로나19 일일 확진자가 아직도 2만 명이 넘는데 계속되는 통계 발표라는 ‘제도’ 특성상 모든 것이 수치화되면서 역치가 높아지고 무감각해지는 인식의 둔화를 시각화하는 것. 기자들이 더 사실적이고 진실에 가까운 접근을 시도한다면 우리 같은 작가들은 왜곡을 더해서라도 그 문제를 제기해보는 것.”이라 말하는 그가 바라보는 사회학적 미학 혹은 태도는 결국 체제를 꿰뚫어 보는 통찰 같다. “SNS도 이미지 위주의 인스타그램보다는 더 진솔하게 구체적으로 드러내는 텍스트 기반의 페이스북을 선호한다.”라고 말하는 그의 영향력이 더욱 커지리라 믿기에 ‘훔치다’도 과감하게 ‘steal’로 바꿔버렸다. 작가의 동의 여부를 떠나, 이 글은 작가의 작업에 기댄 인터뷰의 결과지만 궁극적으로는 나의 글이기 때문이다. 독자 여러분도 이 글에 대한 기억은 점점 지워지겠지만, 6월에는 부디 자신만의 감상법을 훔칠 수 있기를!

  • 소개

배민영
아트 저널리스트이자 누벨바그 아트에이전시 대표. 기획과 평론을 한다.


글 | 사진제공. 배민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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