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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312 에세이

장영은과 삼세영미술관의 만남 (1)

2023.12.03

ⓒ 작업실전경

어느덧 첫눈이 내리고 겨울이 되었다. 전시가 가장 많이 열린 지난달에는 네 개의 전시를 소개했는데, 한 해가 마무리되어가는 12월을 열며 이번에는 단 하나의 전시를 추천하려고 한다. 필자가 오랫동안 팬심을 가지고 바라본 작가, 장영은이 12월 13일부터 31일까지 평창동에 위치한 삼세영미술관에서 삶의 조각>이라는 대규모 초대전을 열기 때문이다.

좋은 작업은 좋은 공간을 만날 필요가 있다. 혹자는 좋지 않은 작업이 좋은 공간을 만나 그나마 힘을 받고, 좋은 작업은 어떤 공간에서든 좋을 것이라고 말할 것이다. 그 말도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좋은 작업과 좋은 공간이 만났을 때 일어나는 시너지 효과와 의미는, 마치 서로가 서로를 위해 태어난 듯한 느낌마저 주기에 더더욱 중요하다. 장영은의 작업과 삼세영이라는 공간의 합은 그렇게 이루어졌다.

이전에 다른 전시를 보러 한 번 찾은 적이 있는 삼세영은 설립 주체가 고미술과 건축에 조예와 관심이 깊다는 걸 대번에 보여주었다. 고미술 상설 전시관을 비롯해 세 개의 전시장을 연결해주는 계단과 통로의 짜임새도 그러하거니와 동네 전경이 파노라마로 보이는 널찍한 창을 통해 눈에 들어오는 조망은 그곳에서 작품과 일몰을 함께 보고 싶게 만드는 무언가가 있다. 알랭 드 보통도 <행복의 건축>에서 “건축적인 우아를 표현할 수 있는 기회로서 창문의 결정적 요소는 유리와 그것을 지탱하는 틀의 관계”라고 하지 않았던가. 건물이 위치한 암벽의 맨살을 그대로 볼 수 있는 뒤쪽 창은 그야말로 건축적 하이라이트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시도는 토탈미술관, 메타포32 등 근처의 훌륭한 전시장에서 공통적으로 발견할 수 있는 특징이기도 한데, 과감함, 고즈넉함 등 각각의 정체성을 받쳐주는 요소로 작용하기도 한다는 것을 상기해볼 때, 삼세영의 암벽 쪽 창은 어떤 반영(reflection)에 대한 생각을 많이 하게 한다.

ⓒ 1, Anthology 46, sewing and colored on fabric, 180×124cm, 2023, DETAIL

이렇게 볼 때, 이번 전시의 영문 타이틀인 ‘ANTHO–LOGY’와 한글 제목 ‘삶의 조각’은 어떤 것을 반영하고 있는가. 서로 직역하는 관계라기보다 하나의 논리 구조를 이루고 있다는 점 또한 매력적인데, 작가의 설명에 따르면 먼저 ‘앤솔러지’는 시 모음집이라는 의미로, 어원은 그리스어의 앤톨로기아(anthologia)로 ‘꽃을 따서 모은 것’이라는 뜻이다. 장영은은 “떨어진 낙엽과 수피(樹皮), 상처와 구멍이 난 잎, 잎이 떨어진 앙상한 나무 등 일반적으로 아름답다고 여기는 것과는 다소 거리감이 있는 소재와 저마다 자기만의 방식으로 이 순간을 살아내는 자연을 통해 강력한 생명의 에너지를 역설하고자 한 작업.”이라고 말한다. 작가는 계절을 단순히 찬미하거나 흐름에 의한 피상적 변화를 담아내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자연 속 낱낱의 개체를 긴 시간 관조함으로써 각자의 방식과 속도로 각자의 계절을 살아가고 있음을 깨달은 것이다. 작가는 노트 말미에 “부단히 일궈온 것들을 모두 내려놓는 용기와, 자연의 순리를 이해하고 받아들이니 일상의 평범한 순간들이 내게 시(詩)로 다가왔다.”고 적고 있다.

ANTHOLOGY’는 2021년에 시작한 연작으로, 각각 2019년부터 작업해온 ‘Eternally Blue : 영원히 푸르다’, ‘Undried Fragrance : 마르지 않는 향기’ 시리즈와 함께 이번 전시에 선보인다. 먼저 ‘Eternally Blue’는 ‘푸른 수묵’을 하는 작가로서 자신의 존재감을 화단에 알리며 버드나무의 의연함을 동경하는 동시에, 그 역시 계절의 흐름에 따라 모든 잎이 떨어질 것을 알지만 푸른 순간을 영원히 간직하고자 했던 마음을 담은 작업이다. 자연의 빛과 결에 대한 작가의 집념이 흉내 낼 수 없는 자신만의 기법과 느낌으로 발현되었으며, 이는 이후 작업의 내적, 외적 성장에 자양분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연장선상에서 작업으로 지난해 호아드 갤러리에서 발표한 ‘흐르는 계절 : Flowing Seasons’ 시리즈는 공간을 사유와 감미로움으로 장악하면서 관람객에게 엄청난 호평을 받았다. 그리고 ‘Undried Fragrance’는 양기훈의 ‘자수매화도’를 재해석한 것으로 아모레퍼시픽 미술관에서 실제로 본 이후 시도한 회심의 프로젝트라고 할 수도 있겠다.

이 글은 '장영은과 삼세영미술관의 만남 (2)'에서 이어집니다.

소개

배민영
아트 저널리스트이자 누벨바그 아트에이전시 대표. 기획과 평론을 한다.


글 | 사진제공. 배민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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