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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331 컬쳐

아직은 다정함을 말할 때 - 중심에서 벗어나

2025.03.07

영화를 만든다는 것, 그런 사람들의 영토

영화 〈차가운 겨울 바람이 불어오면 하루를 보내〉 스틸

서울을 벗어나, 수도권이 아닌 곳에서 영화를 찍을 수 있을까? 영화를 찍는데 지역이 무슨 상관인가. 스마트폰만 있으면 어디서든, 언제든지 찍을 수 있는 시대인데. 정 찍을 게 마땅하지 않다면 자기 자신을 찍어도 영화가 되는 것을. 물론이다. 이미 많은 영화가 스마트폰으로 자신을 찍고 있으니까. 하지만 일정 정도 이상의 규모의 영화, 자신이 아니라 타인을 찍는 영화라면? 다시 말하면, 돈이 드는 영화라면? 그런 영화는 혼자 찍을 수 없을 때가 많다. 영화를 찍는다는 건 역시나 돈이 필요하다. 이때의 돈이란 말 그대로 자금, 달리 말하면 인적, 물적 시스템과 인프라까지 모두 포함이다. 아주 오래전부터 이 사회의 상당한 자본과 시스템과 자원은 서울과 수도권에 집중됐다. 예술이지만 동시에 산업이기도 한 영화 만들기 역시 그렇다. 서울로, 수도권으로, 중심으로, 주류로 향하기 마련이다.

그런 와중에 반대로 움직이는 이들이 있다. 서울을 벗어나서 수도권이 아닌 곳에서 이른바 지방과 지역에서 영화를 만들겠다는 사람들. ‘지역 영화’로 명명되는 일련의 영화가 있다. 서울을 떠나 지역으로 이주하고 지역에서 공부하며 지역에 뿌리내린 영화인들. 좀 더 그 범위를 넓힌다면 지역 거주뿐만 아니라 지역을 영화의 중요한 배경으로 삼고 촬영한 영화도 여기에 해당한다. 성과가 이어졌다. 지역 영화 네트워크 구축, 지역 영화인 활동 지원, 시민 영화문화활동 지원사업 등이 활성화됐다. 하지만 지금은 이 모든 활동이 위태로워졌다. 어처구니없게도 지난해 문화체육관광부가 영화진흥위원회의 〈지역 영화문화 활성화 지원사업〉 8억 원과 〈지역영화 기획개발 및 제작지원 사업〉 4억 원의 지원금을 전액 0원으로 삭감해버린 것이다. 지역 영화 생태계를 완전히 망가뜨리고 파괴하려는 게 아니면 무엇일까. 한번 붕괴하고 망가진 것은 원상복구가 쉽지 않고 된다고 해도 긴긴 세월이 필요하다.

영화 불모지 강원에서 꾸준히 성장해온 햇시네마페스티벌

이러한 암울한 현실 속에서도 빛나는 성과가 있다는 게 그저 놀랍다. 지난 12월 13, 14일 양일간 열린 제8회 강원영화제 햇시네마페스티벌에서 똑똑히 목격했다. 그 어느 곳보다 발전이 더디고 열악하며 소외를 겪은 강원도에서 독립 영화인들이 애정을 갖고 만든 영화제다. ‘당해에 난’, ‘얼마 되지 않은’을 뜻하는 접두사 ‘햇’처럼 신생, 신진, 신인의 마음으로 시작하고 이어지고 있는 페스티벌이기도 하다. 매년 강릉, 원주, 춘천을 순회하며 개최되는 영화제라는 점도 재밌다. 올해는 강릉에서 열렸고 본선 심사를 위해 강릉의 오래된 독립예술극장인 신영에서 16편의 단편영화를 봤다.

영화를 생전 처음 만들어본 사람, 몇 편의 단편 제작 경험이 있는 사람, 단편에 이어 이제 막 장편 데뷔작을 만들고 있는 사람이 한데 어우러져 있었다. 연령도 다양하고 극, 다큐멘터리, 실험, 애니메이션 영화 등 장르도 여럿이다. 강원독립영화협회, 강원영상위원회, 강원영화학교, 강릉시영상미디어센터나 사회적협동조합 인디하우스 등에서 제작하거나 제작을 도운 영화가 상당수였다. 신진 영화인들도 있지만 기존의 영화 제작 시스템을 이미 경험한 감독들이 강원도로 이주해 자리 잡은 경우도 꽤 많다. 그들은 자신의 다음 영화를 만드는 일 못지않게 함께 영화를 만들어갈 새로운 동료를 교육하고 지원한다. 품앗이, 두레와 같은 상부상조의 영화 공동체가 체계를 잡아나가고 성과를 내고 있다는 것을 옆에서 잠시나마 지켜보는 것만으로 괜스레 기분이 좋아진다.

영화 〈구멍뚫기〉 스틸 / 영화 〈워킹 트레일〉 스틸

작품상에 해당하는 황금감자상은 강릉 지역 초등 교사들의 복직 투쟁을 다룬 김상패, 나단아의 〈차별없이 억압없이 혐오없이 배제없이〉(2024)가 받았다. 지역의 구체적인 현안을 알리고 투쟁의 주인공들과 긴밀하게 연대하는 카메라다. 투쟁 현장에 복무하는 영화가 갖게 되는 의미와 가치도 물론 있지만, 이 운동에 힘을 보태고자 선택한 이 영화의 정갈한 구성과 형식이 그 자체로 좋은 결과로 이어진 셈이다. 특별언급작은 장병섭의 〈꿈의 정면〉(2023)이다. 지역에서 좀처럼 보기 힘든 실험영화라는 점이 일단 눈에 띈다. 게다가 8㎜ 필름으로 작업했다. 디지털 촬영과 달리 제약이 많은 필름인데 감독은 오히려 이 상황을 즐긴 듯 보인다. 무한히 열려 있는 디지털 세계와 달리 한정되고 제한된 조건의 필름 촬영 안에서 오히려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범위와 정도를 가늠할 수 있었다는 말이 미덥게 들린다. ‘꿈을 언어로 꾸는 건지 이미지로 꾸는 건지 궁금했다.’는 연출 의도처럼 영화는 잠꼬대 같은 음성 언어와 필름 특유의 물성을 충돌해 꿈의 세계를 탐험한다. 관객심사단이 뽑은 황금옥수수상은 전석규의 〈구멍뚫기〉(2024)가 받았다. 에어컨 설치 기사인 남자가 이혼한 전 아내의 집에 에어컨을 설치한다는 당황스러운 설정에서 시작한다. 둘 사이의 서먹하고 긴장 어린 관계로 심화하고 소강상태에 이른 뒤 얼마간 해소되기까지의 시간이다. 어디 세 편뿐이겠는가. 각각의 영화 모두 한계도 있지만 미덕과 가능성이 엿보인다는 점에서 보는 나로서도 신이 난다.


글. 정지혜

영화평론가. 영화 강연, 비평 워크숍 등을 기획, 진행하는 ‘플로모션(flowmotion)’ 운영. @hwasile153

이미지제공. 햇시네마페스티벌 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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