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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290 에세이

동네에 건네는 인사 ― 잘 가, (1)

2023.01.12


하루가 멀다 하고 사라지고 생겨나는 풍경을 보다 보면, 도시가 변하는 현상이 인간의 ‘생과 사’를 보여주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인간은 종종 죽음에 대해 생각한다. 죽음을 앞두고 ‘버킷리스트’를 작성하기도 하고, 남겨질 누군가를 위해 슬픔을 꾹꾹 눌러 담아 ‘유언장’을 써보기도 한다. 마음만 먹으면 누구든 해볼 수 있다. 이 ‘죽음’이라는 개념을 장소에 적용해보면 어떨까? 생각해보면 어떤 장소(혹은 공간)가 사라지곤 할 때 딱히 그곳을 기리기 위한 무언가를 해본 적이 없다.

매일 걷던 길, 자주 가던 카페, 함께 시간을 보낸 친구와 이웃, 지나가다 반갑게 인사 나누던 가게 사장님들. 이 모든 것들이 눈앞에서 멀어져도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딱히 이상하다고 생각한 적이 없었다. 세상에 ‘당연한’ 것이 있을까? 길이 생기려면 누군가가 와서 공사를 해야 하고, 카페에 가려면 누군가는 운영해야 한다. 작지만 사소한 것들이 유기적으로 연결됨으로써 행위가 일어나는 것이다. 관계성을 이해하고 있으면 당연히 사라질 것이 아니라 기억될 무언가로 바뀐다. 그 순간은 모든 것이 사라지고 나서야 찾아오고 아쉬움과 후회가 몰려온다. 지금이라도, 당장 모든 것을 볼 수 없다고 생각하면 뭐라도 하게 되지 않을까? 안녕을 고하기 위해 할 수 있는 것들을 해나가지 않을까? 그 과정에서 짧은 순간의 사라짐이 슬픈 것이 아니라 그동안의 고마웠던 순간들을 기억하게 되는 것임을 알게 될 터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사라짐에 대한 안녕을 고하기가 이렇게도 어렵고 오래 걸릴 일이었나 싶다. 모든 것이 사라지고 난 뒤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지난날을 돌이켜보며 지금이라도 할 수 있는 것들을 해나가기로 다짐해본다.


어떤 가족이 고척동에 안녕을 고하는 방법

"사라진다. 근데 유독 ‘사라진다’는 말이 눈에 들어왔다. 재개발되는 우리 집을 포함한 동네 때문이었을까? 사라지는 중인 공간의 느낌과 감정 그리고 추억을 캔버스 위에 담았다. ‘어차피 사라질 것인데……가 아닌 지금의 감정인 아쉬움을 그대로 담았다. 처음 두 장을 그릴 때만 하더라도 ‘사라진다’는 마음이 크지 않았다. 하지만 내가 그리고 있는 것은 집 주변이었고, 이내 사라질 곳이었다. 처음에 알았을 때는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매일 보고 있으니 사라진다는 게 실감 나지 않았다. 하지만 그림을 그릴수록 나와 시간을 보낸 공간이 사라진다? 평소에 보던 것들이 사라진다? 그렇게 점점 사라진다는 말이 다가왔다. 이 모든 공간, 시간, 순간은 사라지지만 사라지지 않게 하고 싶었다. 흔적 없이 사라지는 것들 기억하지 않으면 진짜로 사라져 버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흔적을 남기고 싶었다. 기억하고 싶었다. 이번 작품을 통해, ‘사라질 것과 사라진 것을 사라지지 않게……’. 그렇게 사라지는 것을 사라지지 않도록 붙들어 두려 한다."

김찬민(서울공연예술고등학교 3학년), <마읆상회 골목전시> 서문 전문

시간이 많이 흐르긴 했지만, 지난해 4월 고척동 152–22번지에서 특별한 전시가 열렸다. 재개발로 인해 사라질 고척동 일대를 그림으로 남기고 있는 김찬민 학생과 지난 10년간 구로구 일대 주민들의 삶을 기록해온 사회적기업 (주)도’s스토리연구소, (주)스페이스 함께, 문화예술협동조합 곁애, 공연예술 창작터 수다, 시 창작연구소, 시소가 협력해 <허물어진 자리, 지워져도 끝내 남는 것들> 전시와 공연을 준비했다. 고척동 1522–22번지는 김찬민 학생 가족이 30년 전 집을 짓고 3대가 살아온 곳이다. 할머니와 손주는 이주를 앞두고 특별한 전시를 위해 공간을 내주었다. 집주인 김공남 할머니의 생애를 그린 공연이 진행되고, 김찬민 학생은 ‘사라질 것과 사라진 것을 사라지지 않게’라는 주제로 고척동을 기록했다. 3대가 살아온 집에서, 자신들의 살아온 날들과 동네에 관련된 기억을 풀어낸 것이다.

사라질 미래에 대비해 현재를 기록하며 했던 생각과 감정을 풀어내고, 구술과 그림으로 표현되는 과정이 전시를 보는 내내 상상됐다. 눈앞에 펼쳐져 있던 풍경이 한 폭의 그림이 되어 찬민 학생이 살았던 집, 방 안 벽면에 부착되어 있었다. 그림은 온통 회색빛이었지만 동네를 잘 아는 사람들이라면 무슨 색이든 상관없었다.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생생한 빛이 났기 때문이다. 커다란 창문 밖을 바라보았다. 앞으로는 더 이상 볼 수 없는 풍경이다. 재개발은 물리적 공간 변화뿐만 아니라 주거환경 자체를 변화시키기 때문에 과거와 동일한 특징의 동네가 형성되기를 기대하기란 어렵다. 우리가 재개발 과정을 이해하고 적극적으로 의사를 내고, 관심을 가져야 할 이유도 여기에 있다. 더 이상 과거로 돌아갈 수 없기에 애정을 가지고 바라보아야 한다는 것을, 아무 말 없이 그렇게 한참이나 밖을 바라보았다.

이 글은 '동네에 건네는 인사 ― 잘 가, (2)'로 이어집니다.


글 | 사진. 이경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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