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면으로 보이는 주택밀집지역은 재개발로 사라질 구역(흑석9구역)
정면으로 보이는 주택밀집지역은 재개발로 사라질 구역(흑석9구역)
누가 나에게 ‘흑석동’ 하면 무엇이 떠오르느냐고 묻는다면 단연코 ‘빗물펌프장’이라고 답할 것이다. 지하철역에서 나오면 가장 먼저 보이는 건물이면서 흑석동으로 들어가는 길목에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왠지 모르게 슈퍼나 미용실처럼 익숙한, 일상에 훅 들어와 있는 느낌이다. 물론 빗물펌프장을 본 것이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서울에는 총 120개의 빗물펌프장이 있다. 오며 가며 그중 몇 개를 본 것이고, 생각 외로 우리의 일상 가까이에 있다는 것을 깨닫고 놀랐다. 그런데 특별한 거부감 없이 들여다보게 된 것은 흑석빗물펌프장이 처음이었다. 왜 그런가 싶어 곰곰이 생각해보았으나 딱히 특별한 이유는 없었다. 그냥, 궁금했던 것이 전부다. 아래 사진을 본 이후부터는 더 시선이 갔다.
1990년대 동작구민 알뜰장(출처: 동작구청)
1990년에 촬영된 사진으로 빗물펌프장 빈터에서 주민들을 대상으로 알뜰장이 열렸다. 건물 안에서 진행된 것은 아니지만, 친숙한 느낌으로 진행하기 위한 시도가 아니었을지 짐작해본다. 건물 외관 재료로 쓰인 벽돌도 동네 어딘가에서 누구나 한 번쯤 봤을 법한 익숙한 분위기와 느낌을 준다. 그런데 동네 진입로에 왜 빗물펌프장이 있는 것일까?
1985년 동작구 흑석동 16-16 일대의 한강제2근린공원의 도면(출처: 서울기록원)
한강 옆이어서, 빗물펌프장
빗물펌프장은 특정 지역의 침수를 막기 위해 빗물을 강으로 내보내는 역할을 하는 시설이다. 그렇다면 흑석동은 한강과 가까운 위치에 있다는 것을 짐작해볼 수 있다. 이는 과거 사진 한 장으로도 확인할 수 있다. 배 타고 있는 사람들 너머로 보이는 산 인근 지역이 흑석동이다.
1917년에는 나룻배가 정박하는 흑석진이 있었다. 흑석진은 현재 한강대교 건설로 인해 기능을 상실했지만, 사진에는 그 흔적이 보인다. 1920년대에는 일본인이 연못을 조성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광복 후 연못을 메우고, 그 자리에 시장이 생겼다. 연못을 채우던 물이 한강 물이 아니었을까? 그렇게 나룻배가 오가던 길목이니 홍수가 나면 침수되는 건 당연지사. 1960년대 후반에는 홍수 대비를 위해 한강변 정비 사업의 일환으로 공유수면매립이 진행되었다. 흑석동을 포함한 여의도, 반포, 동부이촌동, 압구정동, 구의동 일대에 택지가 생겼고, 대규모 아파트 단지가 들어섰다.
1955년 흑석동 (출처: 한겨레신문 / 원출처: 서울시역사편찬위원회)
한강 근처에 있는 회사에서 근무한 적이 있다. 장마철에 한강을 포함한 주변 상황이 어떻게 변하는지 그때 처음 알게 되었다. 그칠 새 없이 일주일 내내 쏟아지던 비로 한강 물은 계속 불어났다. 나무와 꽃은 흔적도 없이 물에 잠겼고, 한강대교는 겨우 알아볼 수 있을 정도였다. 이대로 비가 계속 온다면 모든 것이 잠길 기세였다. 물이 흐르는 속도도 빨라졌다. 평소엔 잔잔하게 흐르던 물이 폭포수처럼 돌변했다. 올림픽대로는 이내 침수되어 통제되었다. 모든 것이 눈 깜짝할 사이에 변해갔다. 한강 개발 사업으로 백사장을 메우고, 제방을 만들어도 인간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흑석동은 제방 역할을 하도록 설계된 도로 건설로 홍수의 위험으로부터 조금 벗어났지만, 저지대의 침수 문제는 여전히 존재하기 때문에 빗물펌프장의 설치는 필수였을 것이다.
어느 종친의 묘지
사람의 생과 사가 공존하는 동네
서울에 사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꿈꾸는 로망이 있다. 바로 ‘한강뷰’가 가능한 동네에 사는 것이다. 흑석동은 그런 동네 중 하나다. 고층 건물이 아니더라도 고지대에서 한강을 조망할 수 있다. 2005년 흑석뉴타운 지구로 지정된 이후 조금씩 재개발이 진행되었고, 이때 ‘한강뷰’를 강조하듯 신축 아파트 이름에는 ‘한강’이 붙었다. ‘한강 푸르지오’, ‘한강 센트레빌 1차, 2차’. 한강 매립사업 당시 생겨난 반포와 비슷한 잠재 가치를 가지고 있다는 의미에서 ‘서반포’라는 말도 등장했다. 흑석동의 가치는 흑석동으로 설명이 되어야 할 텐데, 서반포라는 말은 오히려 흑석동의 가치를 더 축소하는 느낌이 들었다. 반포면 반포고 흑석동이면 흑석동이지, 흑석동이 반포가 될 수 있을까? 반대로 반포가 흑석동이 될 수 있을까?
그런데 잘 살펴보면, 한강 가까이에 있는 일부 아파트를 제외하고선 의외로 한강과는 좀 거리가 있다. 동네 중앙에 떡하니 솟아 있는 병원과 어느 종친의 묘가 더 잘 보인다. 묘가 있던 곳은 과거 야산이었으나 개발 광풍으로 묘 주변에 아파트와 주택이 빽빽하게 들어섰다. 순서상으로 보면 묘가 먼저다. 어찌 보면 사람이 살지 않던 곳에 집을 짓고 살게 된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동작역과 가까운 흑석동은 심지어 국립묘지인 현충원이 자리 잡고 있으니 결과적으로 흑석동의 절반은 묘지로 이루어져 있다고도 볼 수 있다. 병원과 묘. 사람의 생과 사가 공존하는 동네에 ‘한강뷰’라는 로망이 입혀졌다. 산을 등지고 강을 바라보는 지세를 의미하는 배산임수로 흑석동을 해석하기도 한다. 이런 맥락이라면 한강변의 모든 동네가 배산임수가 아닐까? 정말 사람 살기 좋은 곳이면 사람이 살아야지, 왜 죽은 자의 자리가 되어 있는 것일까?
이 글은 '생과 사가 공존하는 곳에서, 미래의 서울을 상상하다 (2)'에서 이어집니다.
- 소개
이경민
SNS ‘서울수집’ 계정 운영자 & 도시답사 및 기록가.
글 | 사진. 이경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