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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327 에세이

오후의 시각 - 술 외에는 할 게 없으니까

2024.10.10

글. 오후

“윤대통령 한동훈과 러브샷, ‘우리는 다 같은 동지’” 국민의힘 당 대표 선거 다음 날 언론을 덮은 기사 제목이다. 지난 7월 진행된 국민의힘 당 대표 선거에서 한동훈 씨가 당선됐다. 한동훈 대표와 윤석열 대통령은 과거에는 가까운 사이였으나 지난 총선을 계기로 급격히 사이가 악화됐고, 당 대표 경선 기간에 그 균열은 극에 치달았다. 대통령실과 국민의힘, 혹은 윤석열 대통령과 한동훈 대표 입장에서는 ‘불화설은 헛소문이고 사실 우리는 여전히 소통이 잘됩니다.’ 하는 모습을 대외적으로 보여줄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기획된 것이 삼겹살 회동이다. 대통령은 당 대표 선거 다음 날 한동훈 대표를 포함한 국민의힘 지도부를 불러 회식을 가졌다. 삼겹살 외에도 아주 훌륭한 메뉴들이 여럿 있었는데, 기사에 따르면 이는 대통령이 손수 정한 것이라고 한다. 그 외에도 기사에는 딱히 쓸데없는 내용들이 참 많았는데, 한마디로 사이가 소원해진 선후배가 만나서 술 한잔했다로 요약할 수 있다. 혹시나 오해할 분들을 위해 덧붙이자면 이 글은 대통령이나 정부 여당을 비판하는 것도 아니고 정치 비평도 아니다. 단지 우리 사회의 어떤 모습에 관한 소소한 기록이다.

나는 이 기사를 보자마자 여러 가지 면에서 이상한 느낌을 받았다. 먼저 한동훈 대표는 술을 마시지 않는다. 한 대표를 만나본 적도 없는 내가 알 정도의 정보이니 한 대표와 가까웠다는 대통령이 모를 리가 없다. 기사를 보면 대통령은 맥주를, 한 대표는 제로콜라를 마셨다는 내용이 나온다. 살다 보면 술을 안 마시는 사람도 종종 술자리에 함께 해야 하는 경우가 생긴다. 하지만 이 자리는 어찌 보면 대통령이 한 대표에게 손을 내미는 자리였다. 한 대표가 주인공이라고 볼 수도 있다. 그렇다면 술 못 마시는 한 대표를 고려한 이벤트를 기획하는 것이 정황상 맞는 것 같은데, 대통령실은 이를 고기 쌈 싸 먹듯 무시하고 엄청난 배려라도 하는 양 제로콜라를 제공했다. 제로콜라로 러브샷을 했다는 것이 뉴스가 되고, 그걸 읽고 있는 것 자체가 무언가 비현실적으로 느껴지지만 그 부분은 넘어가자. 제공했다는 제로 콜라가 부디 ‘펩시 제로슈거 라임향(제로콜라 중 대중적으로 가장 즐겨 마시는 제품)’이었길 빈다.

나에게 이 퍼포먼스는 약간은 불쾌한, 마치 직장 상사가 부하 직원의 사기를 진작하기 위해 아무도 원하지 않은 회식 자리처럼 보인다. 심지어 그 부하 직원은 술도 마시지 않는데 ‘너를 위해 마련한 자리’라며 생색을 내는… 하… 이건 사과가 아니라 직장 내 괴롭힘이 아닌가. 설혹 한 대표가 술꾼이었다 해도 여전히 개운치 않다.

왜 사이가 좋아졌음을 과시하는 자리가 꼭 술자리여야 하는가? 앞으로 잘해보자고 결의를 다지는 자리는 꼭 술자리여야 하는가? 여기까지 질문이 뻗어나가자, 그럼 이런 상황에서 대통령이 술자리 외에 할 수 있는 퍼포먼스가 무엇이 있을까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오랜 고민 끝에 나는 한 가지 결론에 도달했다.

대안은 없다. 그냥 술을 마셔야지.

경제적 빈곤보다 무서운 문화적 빈곤

물론 다른 방식은 많다. 영화관을 찾거나 연극, 뮤지컬을 함께 볼 수도 있다. 활동적인 그림을 그리고 싶었다면 등산을 해도 되고, 그게 촌스럽다면 조금 더 힙하게 길거리 농구나 당구를 한 게임 해도 괜찮았을 것이다. 차분한 분위기를 연출하고 싶었다면 다과를 하며 차를 한잔 마셔도 된다. 그런데 이 모든 모습은 대통령과 참모들, 그 나이대의 중년 남성들이 생각하기에 통 크게 화해하는 모습이 아니었을 것이다. 골프 정도는 생각할 수 있었겠지만, 대중들은 지도층이 골프를 치는 걸 썩 좋게 보지 않는다. 그리고 골프를 쳤어도 끝나고 술은 마셨을 것이다. 그러니까 어쨌든 그들에게는 술자리가 필요했다.

그리고 이건 그들뿐 아니라 아마도 우리 사회 구성원 대다수에게 통용되는 이야기다. 우리는 친해지기 위해서, 혹은 감정을 풀기 위해서 술을 마신다. 그에 대한 대안이 없는 건 아니지만 보통은 술을 마신다. 심지어 그중에 한 명이 술을 안 마시더라도 이 공식은 성립한다. 다음 날 바로 뻘쭘해지지만 술 마실 때만이라도 호형호제를 하고 누나, 오빠 할 수 있는 것이 한국의 술자리다. 대통령만의 문제가 아니라, 그냥 우리 사회의 일상적인 모습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도 이번 퍼포먼스에는 아쉬움이 든다. 소통하기 위해서 술을 마시는 건 자유다. 대통령 본인 나름대로는 진심이었을 것이라 믿는다. 얼마나 진심이면 안주 메뉴를 직접 선정했겠는가. 하지만 보여주는 퍼포먼스까지, 그럴 필요가 있을까? 퍼포먼스는 다른 것으로 하고 술자리는 자기들끼리 조용히 가져도 된다. 물론 술자리가 나쁘다는 건 아니다. 얼마든지 공개적으로 가질 수 있다. 하지만 윤 대통령은 이럴 때 항상 술자리를 퍼포먼스로 이용한다. 심지어 그 술자리의 모습은 너무도 권위적이다. 권위를 내려놓는다고 하는 행동, 가령 이번에는 넥타이를 풀었다고 한다, 조차 권위적이다. 대통령과 비서진의 빈곤한 상상력의 한계가 드러난다. 10년도 더 전에 오바마 미국 전 대통령이 이럴 때 어떤 식으로 행동했는지를 잘 참고한다면 상상력도 필요 없을 텐데. 어차피 다 쇼라면, 조금 더 다양한 모습을 보여주는 게 본인을 위해서도 사회적으로도 더 좋지 않을까 싶다.

마약과 관련된 강연을 하며 내가 자주 하는 표현이 있다. “사람들은 종종 이렇게 이야기해요. 커피를 마시지 않으면 일에 집중이 안 돼요, 술을 마시지 않으면 사람들과 친해지기 어려워요. 그런데 이건 반대입니다. 우리는 커피를 마시기 때문에 일을 할 수 있는 게 아니라 커피를 마시기 때문에 커피를 마시지 않았을 때 일에 집중하지 못하는 겁니다. 마찬가지로 술을 마셔서 사람들과 친해지는 게 아니라 술을 마시기 때문에 술을 마시지 않았을 때 사람들과 친해지지 못하는 겁니다.”

우리 사회의 문화적 빈곤이 아쉽다. 어쩌다 성인들이 만나서 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놀이가 술이 되었는지 모르겠다. 아무튼 러브샷까지 하셨으니 두 분은 애들처럼 싸우지 말고 오래오래 러브러브 하시길 빈다. 오늘은 이 씁쓸한 마음을 채우기 위해 술 한잔해야겠다.


오후(ohoo)

비정규 작가. 세상 모든 게 궁금하지만 대부분은 방구석에 앉아 콘텐츠를 소비하며 시간을 보낸다. 〈가장 사적인 연애사〉 〈나는 농담으로 과학을 말한다〉 등 일곱 권의 책을 썼고 몇몇 잡지에 글을 기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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